-물 한 켤레 신고 방랑하시나요? 최정례시인을 추모하며,
L, 나 C야. 나는 이곳으로 왔어. 여긴 노리치 블루드래곤 홀인 것 같애. 그곳으로 치면 동해안 속초 수백년 된 수협 공판장 같은 곳이야. 언제나 이곳은 펄떡대는 생선들이 궤짝에 가득한 새벽시장이 열리지. 나는 여기서 생선의 얼굴들을 구경하는 게 좋아.
L이 집 주변 인공호수에서 보았다는 인면어 같은 것들 말이야. 나는 오늘은 민어가 여기도 있나 찾아보고 있어. 오늘은 으슬으슬하고 몸살이 오려고 해서 민어간국을 끓이려고. 그 목포 근대박물관에 갔다 민어의 매력에 푹 빠진 이후 나는 어딜 가나 ‘민어,민어’하네. 그 있잖아. 공교롭게도 이 말은 철썩 ‘미노’, ‘스타게이징미노’라는 말에 달라붙네. 별 보는 잉어 말이야. 잉어가 저 까마득한 별을 보려면 배를 뒤집고 누워야 할텐데, 그건 삶의 반대편에서나 가능한 일 아닐까. 하얗게 배를 뒤집고 누워서야.
L, 나는 며칠 전 이런 기사를 읽었어. 사람들은 빛을 보면 전기뱀장어처럼 감전된다구. 그래서 백사장에 모래 구덩이를 파구 그곳에서 뒹굴고 그런다구. 그러면서 사용한 콘돔 같은 것이 바닷물에 흘러들어 물고기를 질식사하게 한다구.
사랑이란 뭘까. 사랑이란 이 무구한 아첨의 말에 나두 휘둘려서 육교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지. 사랑하는 사람이 섬으로 요양가던 날. 어려운 신혼 살림에 간신히 장만한 아파트가 무너지던 날. 레바논 감정 같은 뭉글뭉글한 구름이 몰려오던 날. 벽 속에 뚫린 총알 자국을 오락가락 갈매기처럼 보던 날. 그 아파트 이름이 ‘은하’였단가. 모든 건 ‘순간instant’이고 찰나고 풍덩이고 찰싹이고 3분 자동 세차장 같은 거야. 그날 어떤 표지판에 대해서 우리 얘기했던 거 기억나?
그곳은 세븐시스터즈 같은 곳이야. 아주 새하얀 절벽이 있는 곳이지. 그 꼭대기엔 ‘fall hazard’라고 써 있어. 그런데 빛의 휘광에 싸인 그곳에선 ‘fall’만이 보이지. 그래서 뛰어내린 거야. 이곳은 뛰어내리는 곳이구나. 그 사람은 죽었을까 살았을까.
그러고 보니 나는 노리치에 있지 않고 쿠사마 야요이 거울의 방에 있는 것 같애. 빛이 가득한 방. 너무 현란해서 그 빛에 쓰러지지 않으려고 나는 빛기둥에 기대 있었지만 나는 결국. 그러나 L은 언제나 그걸 붙잡아야 한다고 내게 소리를 질렀지.
C는 간호사에게 치간치솔을 숨기고 무균실에 들어간 최초의 사람이고, 또 무균실에서 시집을 교정하고 시집을 낸 세계 최초의 시인. 해왕성형 인간이라고. 그때 그 말 너무 고마웠어. 그때 보내준 음악도 좋았어. 북극이던가. 녹는 유빙 위에 피아노를 놓고 치는. 피아노 소리가 끝나면서 유빙이 녹는 소리를 들려주었지.
빛이 유빙 속으로 투숙객처럼 스며들었지. 나는 그곳에서 묵었어. 그때 K와 와서 이 빛의 호텔에서 체크아웃도 해주고 우리집에 와서 전복죽도 끓여주고 마약계란도 해주고.
은하, 스타게이징 미노, 이런 옛날 얘기 하다 보니 다 빛들 천지네. 이 빛들이 우리를 그 시절의 ‘명동’으로 데려가네. 은좌나 금좌와는 다른 밝을 명의 명동. 나는 L, 여기가 노리치가 아니고 명동 전진상 기념관 작은 강의실에 있는 것 같아. 우리는 화요일마다 그곳에서 만나 습작이란 걸 했지. 그때 우리는 좀 모자란 해적 같았어.
시가 타이핑된 종이배 하나를 O선생님에게 내면, 선생님은 가차없이 그 배를 침몰시키고 우리는 몸이 사라진 비참한 얼굴로 의자 귀퉁이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곤 했지. 이 해적같은 비겁한 인간들아. 더 이상 이렇게 하려면 시를 쓰지 마시오.
그때 그 종이배를 L은 아직도 서랍 속에 보관하고 있다고 했지. 나는 이사를 다니느라고 다 버렸지만, 그때 시 하나 여기로 보내줄 수 있어.
나는 그때 L이 썼던 시 하나가 무지 좋았는데, ‘물 한 켤레’라는 구절이 들어간 시 말이야. 어떤 신문 최종심에 올랐다는 그리구는 탈락의 지속.
요즘에는 ‘침묵 한 송이’, 이런 구절들 많이 쓰긴 하지만, 나는 그때 그 환치가 아주 충격적이었어. 나는 매일 양말이나 스타킹 한 켤레를 신으며 그 ‘물 한 켤레’를 생각했어. 이걸 신고 걷는 기분 알아. 지하철을 타고 계단을 뛰어오르고, L이 마지막으로 근무하던 그곳의 이름도 ‘합정’이라고 했지. 어디선가 뿔뿔이 흩어져 흐르던 물이 합쳐지는 곳. 물은 빛을 탐닉하면서 자꾸 손가락 사이로 달아나서, L은 그곳 7번 출구를 빠져 나가며 매일 ‘고귀한 비참’을 맛보았다구. 동료라는 이름은 십자 문양으로 칼집을 낸 ‘캄파뇽’이란 빵 이름에나 남아있다구. 그렇지만 나는 늘 L을 동료라고 생각했던 거 알아?
L, 그때 그 수장되었던 종이배들을 찾았다구. 흰 배를 뒤집고 죽어서야 별을 볼 수 있었던 그 물고기처럼 우리는 그때 빛을 보기나 했던 것일까.
L, 우리 그때 신안해저유물전 같이 갔단 거 생각나. 진흙뻘 접시, 옹기, 그릇 같은 것들이 가득한 방이었어. 따개비나 바다소금쟁이 같은 게 아직도 붙어있는. 거기서 나는 궁녀가 쓴 시가 적혀있는 접시 하나를 보고 거의 수십년을 만지작대다 간신히 마지막 시집에 수록했지.
그 궁녀는 후궁의 귀고리, 그게 차가운 성질의 금속성이어서, 미리 체온으로 덥혀주는 궁녀였을까. 그게 그 궁녀의 본분이었을까. 그러고 보면 우리도 그 궁녀의 처지와 뭐가 다르지. 우리는 이 빛의 유폐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있을까.
그때 L 역시 내게 ‘블루 아라베스크’라는 소설에 나온다는 이런 비슷한 얘기를 들려줬지. 오달리스크에 나오는 풍성한 살의 후궁이 잔뜩 마른 관광객들을 ‘기형적’이라고 생각하는. 당신들은 잔뜩 코르셋으로 몸을 졸라매고 있어. 그건 억압적인 빛의 기계야, 자유롭게 산란하지 못하는. 골방에 갇혀 지내는 나는 후궁에 불과하지만, 너희들보다 무지 자유롭다구.
그때 나눴던 ‘문질빈빈’이란 말도 기억나지. 이제 간신히 시집에 넣었어. 나는 그걸 수십년 동안 그 말의 물성에 빠져있었는데, O선생님이 늘 강조했던 ‘현상과 사실’에 배치된 이 관념어를 아주 지독한 고통을 치룬 뒤에나 시로 쓸 수 있었어. 나는 심지어 O선생님에 대한 강박으로 우리집 고양이 이름을 ‘코기토’라고 지었다고. 시인은 인식하는 자라고. 인식하라고 사실만 써도 좋은 시가 나온다고.
L, 지금은 내가 아이오와에 와 있는 것 같애. 아니 ‘마이오피아’, ‘근시안’이라는 뜻을 가진 서점에 있는 것두 같구. 그때 내가 리딩했던 시 중에 다른 나라에서 온 작가들은 「보푸라기들」에 주목했어.
그건 내가 부제로 ‘L에게’라고 해서 ㅎ잡지에 발표했던 거지. 그런데 두번째 시집을 엮기 전에 원고를 한 번 읽어달라고 L에게 보냈을 때, 그 부제를 빼달라고 애원했던 거 생각나. 그때 L의 말을 들어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 우리는 어떤 식당에서 순두부를 시켜 먹었지. 내 딸애를 키울 때는 바빠서 잘 몰랐는데, 우리가 그 희끄무레하고 물컹한 것을 삼키는 동안, 뜨거운 장판 바닥을 꺽꺽 기어다니는 L의 갓난 딸애를 보면서 썼던 시지. 혀를 델 정도로 뜨거웠던 그때의 감각.
버러지와 먼지와 세포가 어떻게 피부를 얻고 몸이 되는 과정. L이 입고 있던 스웨터 곳곳에는 보풀이 뽀얗게 일어 순두부의 몽글몽글한 이미지와 같았어.
스웨터는 어떤 예기치 못한 파찰이 올 때마다 점점 보풀을 늘려가고 그러다가 정전기가 솟고, 그렇게 스웨터는 헐거워지다가 숭숭 구멍이 뚫리지. 몽글몽글하다가 스러지지.
나는 그때 백석을 읽고 있었어. ‘돌비가 깨지고 은금보화가 묻히고 까마귀도 족보를 이룰 동안’ 이 구절을 늘 안고 다녔는데, 그게 거기서 터진 거지. ‘파찰’이라는 말을 가만 들여다 보면, 그안에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부딪침’이 오래전부터 있었던 걸 거야. 그래서 만들어진 보푸라기들. 그 보푸라기들이 결국 내 시야.
L, 나는 노리치에서 한 40분 더가면 나오는 크로머 해안가를 걷다가 L이 수정공원을 가로지르며 이렇게 중얼대는 걸 들었어. O선생님이 서후리로 요양가시기 전 살고계시던 회색목조건물이 보인다는 공원 거기 맞지? 가끔 그것에 가본다고 했었지.
이 먼곳으로도 L의 말은 또렷이 들렸어. C, 이곳에는 오늘 폭설이 와. 도로에 뿌려진 제설용 염화칼슘조차 빛을 투각하는 날이야. 혼잣말하는 소리를. 투사 아닌 투각.
이상기후가 와서 난방도 못하고 공동수도가 동파되고 공용화장실이 얼어붙어 그걸 녹이려고 제설함에 염화칼슘을 훔쳐가는 사람들 얘기.
그러고 보니 L, 여기서 만난 갈매기들이 모래사장의 복사열을 받아 분홍색이네. 이곳에서도 이상기온으로 해수면이 점점 올라오고 백사장은 사라져 가고 있어. 녹색말들이 이곳을 덮어오고 바다가 사막화된다고 하네.
어쩌지, 그런 걱정을 하면서 나는 우습게도 이 해변에 와 해산물 요리가 아닌, 양 내장에 오트밀을 채워넣은 음식을 주문하고 H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어. 섬 출신 선생님은 늘 불로 볶아낸 소금에 대한 얘기를 하셨지. 아주 맛이 좋다고. 이건 내 고향 특산물이라고. 저 갈매기, 뜨거운 백사장에 달궈진 그 갈매기 분홍 발목에 매달린 알갱이가 그걸 닮은 거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그 재갈매기를 보겠다고 가서는 안 돌아오시네.
식용과 제설용 소금은 외양은 똑같아. 그러나 제설용 소금은 눈을 녹이는 열도를 갖고 있지. 나와 비슷해. 나는 투사 당하기보다 투각하는 사람 쪽에 속하지.
H선생님은 불로 볶은 소금은 해풍과 빛에 말린 천일염과는 달리 자줏빛 소금, 자염이라고 부른다고 하셨어. 오랜 침묵의 졸임 끝에 나오는 결정. 시 쓰는 사람의 자세. 자염의 자세.
그래, H선생님 정년퇴임을 기념하는 ‘묵독회’는 그 자염의 자세를 닮은 시 낭독회였지. 그냥 화면 위에 글자들이 박히며 지나갔지. 배경음악도 인간의 목소리도 소거된.
그때 L이 발표했던 시에는 처음 듣는 기이한 언어들로 가득했지. 사해파, 악어아가배, 세설금, 투쟁용, 사자왕환 등. 이게 대체 뭐람. 알고보니 그것은 선인장 이름들. 그때 L은 그 선인장 가시를 모아 이불을 만들고 불면을 즐기고 싶다고 했었나. H선생님은 참 뜬금없는 시라고 웃으셨어.
L, 나는 어둠 속에 앉아 화면에 흘러가는 글자들을 보는 게 참 괜찮았는데, 이곳에서도 어떤 시인의 낭송회가 있다고 해서 가보았어. 시는 안 읽고 보자기에 덮어놓은 걸 하나하나 벗겨내며 정원에서 발견된 도자기 파편들, 털실 한 뭉치를 보여주면서 여러가지 얘기만 하더라. 감자칩 같은 걸 파삭파삭 씹으며 관객들은 웃고 떠들고, 나도 돌아가면 이런 그때의 묵독회와 정말 다른 시끌시끌한 낭송회를 한 번 해야지 했는데.
나는 ‘벙어리소매스웨터’를 보자기로 덮어놓았다가 벗겨내며, 그것에 대한 얘기를 해야지. 스웨터에 잔뜩 난 보풀을 틈틈이 잡아뜯다 결국 구멍이 나고 그걸 다시 꿰매 입으려다 소매를 겹쳐 꿰매는 바람에 팔을 낄 수 없었던 벙어리소매웃옷. 다른 보자기를 벗겨내면 ‘초록 씨앗’이 하나 있을 거야.
씨앗 얘기하니 L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 내가 우겨 L의 첫시집 제목에 이 ‘씨앗’을 넣어야 한다고 한 거. 나는 그때는 왜 이렇게 씨앗이라는 말에 꽂혀 있는지 몰랐는데, 나중에 짜이를 끓이며 알았어.
내가 이곳으로 오기 전에 L과 K와 나눈 것도 짜이네. K가 마약계란 졸이는 법을 설명하는데, 나는 갑자기 짜이가 끓이고 싶어졌어.
L, 힘들 때는, 질식할 정도로 그럴 때는, 그냥, 짜이를 끓여. 먼저 짜이 재료를 한 스푼 넣고 물을 자박하게 안치고 볶다가 우유를 적당히 넣어. 꼭 편수냄비를 써야해. 뾰족한 입술 모양 주둥이가 있는 거야 해. 그리구 뚜껑은 투명유리로 된 거라 해. 눈을 잠시라도 떼면 안 돼. 금방 끓어넘치거든.
그리구 책상 위에 놓인 것들은 다 치우고 무늬없는 ‘흰 컵’ 하나만 놓아둬. 그리구 쪼르르 따르는 거야. 그 따끈함이 손 안으로 오고 그 손으로 펜을 잡고 그냥 쓰는 거야. 누가 뭐라든 내가 쓰고 싶은 걸 말야.
그러면 여기 재료를 보여줄게. 후추, 시나몬, 여기 초록 씨앗 같은 게 보이지. 카르다몸이야. 향신료 중의 하나야. 근데 나는 카르다몸이라는 말에 ‘몸’이 들어있다는 사실에 매혹되었어. 이제 ‘몸의 세계’를 잘 돌보야지. 끔찍한 시 말고.
나는 다시 드래곤홀 천창 아래 앉아있어.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는 소리만 웅웅거려. 헝가리에서 온 사람이 폴란드에서 온 사람들이 모국어를 잊고 다른 말을 더듬거려. L, 나두 마찬가지야. ‘보,푸,라,기’가 무슨 말이었더라. 뜻을 버리고 소리만 남은 말들이, L과 나눴던 말들만, 말들의 파편만 가득해.
그때 내가 줬던 솔치는 먹었어? 이건 청어 새끼라는데, 나는 냄비 바닥에 붙어있는 반짝이는 눈알을 보고 난 뒤론 못 먹겠더라. 그래도 솔치꽈리고추조림은 해서 식구들 상에는 내었는데 자꾸 눈알 반짝거리던 게 어른거려. 저 눈으로 심해 바닥을 보았을 텐데.
그리구 오색 백합꽃이 가득한 내가 준 랩치마는 걸쳐보았어? 그걸 입고 L이 좋아한다는 위브스텝은 해보았어? 발로 뜨개질하는 거라며. 털실이나 대바늘 없이도 하는 빛의 뜨개. 시 쓰기도 다를 바 없지. 실체없는 헛손질인데 끝에는 벙어리소매스웨터 같은 게 결과물로 우습게도 남아있어.
항상 내 얘기를 잘 들어줘서 고마워. L의 귀를 어느날 보았는데, 생각보다 귓구멍이 작더라. 바늘로 포옥 찔러놓은 거 같애. 그 귀로 세상의 시끄러운 말은 어떻게 듣는지 걱정이야.
언제 같이 L이 말했던 ‘무헤르’라는 서점에 같이 가자. 훈제된 돼지고기가 주렁주렁 걸려있던 정육점 골목을 지나다 발견했다는 그 여자들만의 서점에. 그곳에 있는 책들의 저자가 모두 여자라는 게 신기했다 했지. 수백년 전 궁녀가 쓴, 접시에 쓴 그 시를 그 서점에 꼭 알리자. 제공하자.
L, 서랍 속에서 ‘밝을 명’의 명동 시절 시를 찾으면 꼭 보내줘야 해. ch2222, 그 옛날의 주소로 말야. 왜 2가 네 번이나 반복되냐고 그때처럼 묻지 말고 그냥 백사장 복사열에 반영된 갈매기 그림자라고 여겨.
나는 요즈음 아무래도 이스트앵글리아 대학 해변 마을에 있는 것 같애. 이곳에서 맨날 뭔가 빚고 만들어. ‘빛그물’에 담긴 여름열무물김치를, 민어간국을, 벌나무 차를, 후무스를, 오색북어보푸라기를, 짜이를 보내줄게. 내가 마감을 앞두고 딴전피우며 만든 것들. 이걸 언어 난민들에게 한 그릇씩 나눠주면서 매일 오늘의 요리를 생각하지.
여기는 바람이 쌔액거리는 항구라서 늘 으슬으슬해. 그냥 뭘 생각하거나 원망하지 말구 그냥 짜이를 끓여야겠어.
이제 내게도 사랑의 마음을 내어야겠어. 혈구탐식성으로 시작되는 내 것인데도 나도 기억못하는 13글자의 그것을 -내 진단명 말인데, 혈구탐식성 림프조직구 증식증이라는-지우고 13가지 요리를 할 거야. 그치, 13은 참 이상한 숫자야. 그걸 보자기로 덮어놓았다가 하나하나 열며 내가 정성을 다해 만든 걸 대접할게.
너희들은 빈 손으로 와서 새의 눈알을 뽑고 무화과 열매를 폭식하게 하고 사과로 만든 럼주에 익사시켜 만든 그 졸참새 요리를 먹듯 냅킨으로 눈을 가리고 말없이 먹어주면 좋겠어. 이게 또 다른 ‘빛의 묵독회’에 대한 나의 구상이야.
나는 O선생님에게는 핏물이 줄줄 흐르는 고기를, H선생님을 위해서는 민어회를, L을 위해서는 마샬라 짜이를 준비해 두었지만 보자기에 덮여 있어서 보이지 않으니, 잘 될지는 모르겠어. 선택의 기회는 한 번뿐이니. 근데, L. L이 보자기를 열었는데, 핏물고기가 나오면 어떡하지. L이 미간을 찡그리다가 어쩔 수 없이 포크를 들면 나는 좋아라 웃을 거야.
이제 무엇보다 몸을 돌봐. 깔끔쟁이 O선생님이, 우리들과 말 한 마디 섞지 않는 그분이 명동 프린스호텔에서 핏물 줄줄 흐르는 스테이크를 드실 때, 우리 종이배는 다시 한 번 침몰했었지. 신안해저유물선에서 발견된 궁녀의 접시처럼 뒤집혀졌지만, 궁궐 밖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담은 시는 진흙뻘로도 어떤 희귀한 흰개미 염료로도 지울 수 없었지.
웃다보니 속이 출출하네. 뭐라두 만들러 가야겠어. 나는 이 방대한 초지에서 양들이 먹지 않고 피하는 풀들을 눈여겨보다가 곰취 같은 걸 찾아냈어. 오늘은 곰취장아찌를 담글 거야. H선생님이 갈매기 발목에 매달려 있던 분홍 소금을 많이 모아두셨다고 가지고 오신대. 어쩔 수 없지만, 그걸로 절여야지.
나와 동갑내기 시인L도, 갑작스런 H선생님 제의로 눈 덮인 양수리에 같이 갔었던 평론가J도, L시인도 이곳에 왔으면 좋겠다. 왜 거길 그렇게 가자고 하셨는지, 지금도 선명해. 얼어붙은 강변 빛이 어떤 개찰구 같았지. 그러더니 가버리신 거야. 우리들을 놔두고. H선생님과 그렇게 헤어질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지.
그리구 L을 만나게 해준 나의 직장 동료이자, 시인Y의 아내인 K도. 특히 염화칼슘을 훔쳐야만 겨울을 날 수 있는 사람들 몇몇도. 그래, 그분도 꼭 모시고 와야 해. 내가 한때 돌보기도 했던 포항에서 홀로 투병 중인 선배시인 C도.
그래두 나는 L의 첫시집 제목에 씨앗이 들어간 게 좋아. 씨앗, 보푸라기, 카르다몸. 그 초록 씨앗에 들어있는 ‘몸’이라는 말.
*최정례 시인 추모특집 서정시학에 발표했다. 추모라는 말이 싫어, 아직은 곁에 있다 믿고 싶은 최정례 시인이 먼곳에서 보내는 편지로 상정하고 쓴 글이다. C 최정례시인, H 황현산 문학평론가, O 오규원시인, L은 이문숙이다. 우리는 1989년부터 같이 습작했다. 외국어 표기는 서로 나눴던 입말을 따라 표기했다.
*권진규, 노실의 천사. 선자, 1966, 테라코타, 37.9 x 21.2 x 47.5cm,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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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숙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2005 시집「천둥을 쪼개고 씨앗을 심다」 창비, 2009 「한 발짝을 옮기는 동안」 창비, 2017 「무릎이 무르팍이 되기까지」 문학동네,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