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물의 종례

-에밀리 디킨슨처럼

by 시인 이문숙

훗날 팔월에는 아마도,

초원이 타는 듯 펼쳐질 때,

조심하세요, 이 생명의 작은 냇물이

어느 불타는 낮에 물이 마르지 않도록

-에밀리 디킨슨의 ‘당신의 작은 가슴속에 냇물이 있나요’


창가에 기대운다. 소리죽인 뒷모습 어깨엔 날개죽지만 오르락내리락한다. 맨발로 풀밭을 걸어야 해도 풀물이 들어도 하얀 옷 에밀리.


한참 지켜보던 민주가, 선생님, 울지 마세요. 샘 눈물 땜에 한강물 수위가 높아지고 범람하면 안 되잖아요. 우리 다 죽잖아요. 우리 거기 익사하면 안 되잖아요. 울지 말아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무릎을 풀썩 꿇는다. 다시는 의자 안 던질게요. 유리창 안 깰게요. 영어 시간에 잠만 잘 게요. 약 먹고 누워만 있을게요.


과잉행동 장애 진단을 받은 민주가 선생님을 따라 운다. 짝꿍 없는 혁준은 코를 파며 지켜본다. 그러다 결국 같이 운다. 운석 같은 주먹이 눈을 훔쳐낼 때마다 검은 그래피티가 뺨 위에 완성된다. 검은 피카소 미셀 파스키아. 식당 소스로 그림을 그리던.


민주는 오늘도 3교시 영어 시간 브로콜리 영어 샘과 내전을 치뤘다. 의자를 던지고 주먹으로 복도 유리창을 내리쳐 복도에 핏자국이 뚝뚝하다. 오늘도 혁준을 괴롭히려 식판에 점심 메뉴로 나온 브로콜리를 으깨어 휘젓는다. 분노로 가득한 니키 드 생팔의 사격회화. 청록색 폭탄이 터져 흰 벽에 초록 피.


검은 피카소는 쪼르르 달려와 에밀리에게 고자질한다. 샘, 민주가 나를 괴롭혀요. 커터칼로 팔목을 그어버리고 싶어요. 상시적인 고백성사를 한다. 선생님 생팔이 니키드 생팔이 내 식판에. 빨간 제육볶음과 햇쑥된장국, 으깬 브로콜리를 뒤섞어 추상화를 그려놓았어요. 반 애들이 나를 다 놀려요. 너 밥 먹으러 학교 오지.


식판을 든 채 잔반 국물을 교무실 바닥에 뚝뚝 점묘하며 혁준은 배고파서 죽을 지경이라고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고파고고파고파.


무쇠의 교무실이 들썩거린다. 무쇠의 잡무에 에밀리도 실비아도 고개를 들지 못한다. 바쁘다바쁘다죽을틈도없다야. 좀 조용히 좀 살자. 시대가 변해도 다름없는 무쇠의 거푸집에서 반복적으로 찍어내는 교무실 풍경.


무쇠의 책상에 책꽂이. 캐비넷에 서류뭉치. 배고파고파고파가 메아리하며 부딪친다. 양철식판을 양철북을 두드린다. 무쇠의 유리창이 파열하기 시작한다.


강에서 강물

나무에서 나뭇잎


민주가 혁준의 코피를 터뜨리고 조롱한다. 이 뚱보 바보새끼야. 식판의 이 재료로 그림을 그려봐.


민주의 잘 모르는 결여와 지나친 명랑과 가면우울이 만드는 매일의 충돌, 전쟁. 교실에서 벌어지는 언어의 교란. 소년들의 충치.


후문 옆에 숨어 있다 민혁이 민준을 준혁을 그들의 금품과 고가의 신발을 갈취한다. 백 원만 빌려줘. 그 신발 하루만 신어보자. 그러던 혁민이 초미니스커트 민정을 데리고 가출한다. 집단구타한다.


무쇠의 거푸집 교무실에선 아무튼 이름에 ‘민’을 넣으면 안돼, 너무 ‘민’주적이 되면 질서가 붕괴돼, 혼란이 가중돼. 안돼안돼. 이런 대화가 공중을 우회하다 머리 위로 쾅 폭발한다.


맞아, ‘혁’자두 무섭다, 민혁일 봐. 무슨 혁명아 같잖아. 혁명아라서 도무지 자기 얘기만 해. 징벌위원들이 무쇠의 망치를 쾅쾅쾅.


그 많은 ‘민 민 민 민’들은 무쇠의 복도에 몰래 와서 무쇠의 점심으로 나온 무쇠의 고기만 급식통 바닥이 드러나도록 먹고 무쇠의 담임 몰래 도망가 버린다. 다른 애들은 먹을 거라곤 풀뿌리뿐이야.


무기정학과 자퇴의 정학의 시간. 무쇠의 귀, 입술, 혀 피어싱. 타버린 가물어버린 팔월의 냇물.


그러나 그녀 에밀리는 어떻게든 자신을 달래본다. 나만이라도 달리 생각하고 그 ‘민’들의 좋은 점을 찾아야 한다. 하얀 에밀리, 치열한 실비아가 되어야 한다고.


그녀들은 아름답게 오역한다. 민주는 민주다. 눈이 녹아 다리를 무너뜨리는 삼월의 강물. 그래서 저항한다. ‘자해’시간에 사회 선생님으로부터 그렇게 민주주의를 배웠다고 생각한다.


약싹빠른 모범생 민식과 달리 혁준은 속겉이 같아 누구보다 우직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혁과 민이 들어간 이름의 아이들이 원석처럼 울끈불끈하지만, 다른 우등생보다 잘 가공하면 더 반짝이는 보석이 될 거라고 믿어본다. 보석도 본래 이름은 돌멩이 아닌가.


덩치와 다르게 자폐아 밥 먹는 하마 혁준은 끊임없이 바스락거린다. 조용히 혁명하고 준동한다. 말썽이 말썽을 끌고 다닌다. 젓가락으로 장난을 하다 허벅지를 찌른다. 양호실에 매일 가 치료를 받고, 하얀 가운을 입은 양호샘의 단골 환자가 된다. 야, 오늘도 또 왔니. 작작 좀 해라.


‘자학’이란 수학 시간에 ‘똥떡’이 너무 고파서 코의 갱도를 파고 구불구불 레일을 놓는다. 어디로 그렇게 매시간마다 아무도 탐구하지 않는 미지의 여행을 떠나고 싶니, 혁준아.


국어가 싫어 ‘굶어죽어’로 바꿔놓는다. 국어 샘은 오늘도 하얀 플레어 스커트flare skirt를 삼월 강물처럼 입고 교실 문을 연다. 가끔은 민주가 바닥에 거울을 놓거나 폰으로 찍기도 한다. 그걸 안 에밀리는 혼낼 줄도 모르고 창가에 서서 그냥 훌쩍댄다. 민주야, 제발.


눈물의 수위, 1 밀리미터. 파고는 없음. 풍랑주의보 직전임.


그렇게 시끄럽던 교실이 차차 조용해진다. 우리는 그런 울음 그친 국어샘 에밀리가 하얀 분필로 적어주는 시를 공책에 적는다.


연필 한 자루도 가방에 넣고 다니지 않는 우리를 위해 에밀리는 당근 잎 토끼 그림이 있는 필통에 시간마다 열 자루 연필을 갖고 다닌다. 잘 깎인 연필. 연필의 나무 냄새.


연필에서 시

나무에서 나뭇잎

강에서 강물


혁준은 ㅍ을 몰라 ㅂ으로 쓴다. 한 잎의 오자typo인

한 입. 잎이 아니고 입이라니. 역시 먹는 것만 밝혀. 강물의 ‘ㅇ’이 사라진 가물. 선생님 에밀리는 애들이 혁준을 놀리기 전, 아, 혁준은 시인이네. 강물이 가물면 가물이 된다는 걸 어떻게 생각했어.


강물에서 가물


로버트 하스 Robert hass의 시 'time and materials'에서 페인팅Painting'의 'n'이 긁히고 덧칠되면서 ‘t’가 지워져 페인잉Paining이 되는 순간.


에밀리 그녀의 'n'은 하얀 옷처럼, 필통의 하얀 지우개처럼 점점점 말줄임표를 닮아간다. 아이들의 킬킬거리던 음흉과 속셈이 깨끗한 칠판 위에 샘물체로 흘러가는 시 구절 앞에서 나날이 유순해진다.


나무에서 나뭇잎

페인팅에서 페인잉


소년이거나 청년 혹은 노인으로 이어지는 이 진행형의 지속적인 그림 그리기 페인팅painting. 긴 시간 속에서 ‘t’가 누락된 이 언어는 결국 명사 ‘페인pain’을 진행형 동사 ‘paining페인잉’으로 바꿔놓고 만다. 이 놀라운 언어의 변이. 3월인데 이미 타버린 강물. 탈자와 오자를 수락한 냇물.


담임샘이자 국어샘인 에밀리 입이 잎처럼 뾰족해지고 눈동자가 흔들리면 민주나 혁준은 사실 겁이 난다. 그녀가 또 울까봐. 그 눈물이 흘러가 한강물에 보태지고 그 수위가 드높아지면 결국 다같이 엉엉 울게 될까봐. 남학생들이 걸핏하면 더 잘 운다지 않니. 여자애들은 눈물콧물 없이 야물고


눈에서 눈물

나무에서 나뭇잎


나무애서 나무입. 혁준의 자유로운 삐뚤빼뚤. 시란 ‘맞춤법 규정’ 같은 걸 지우고 파괴하는 거야, 라는 듯. 혁준에게 칭찬의 강물을 부워준다.


에밀리 국어샘은 하얀 스웨터를 걸치고 오늘도 '시첩'이라는 이상한 공책에 시를 적어준다. 하얀 눈물의 수업과 종례를 한다. 다리를 무너뜨릴 수 있는 삼월 강물 같기도 한 우리들은 미안해 고개를 들지 못한다.


가끔 혁준은 그 에밀리를 추적해 이상한 편지를 보낸다. 저 출석부 지금도 다 외워요. 1번 고혁에서 32번 이정훈까지. 그래도 혁준은 제빵사 자격증을 따고 도배를 배운다.


살이 빠진 미남자는 ‘샘 저 살 뺐어요.’, 사진을 일방적으로 전송하고 자신의 점점 좋아지는 고등학교 성적표를 캡처해 올린다. 더 이상 저는 낙제생이 아닙니다. 저는 그날의 가물어 타버린 8월 강물이 아니예요. 한강수 흘러가는, 이런 구절로 시작되는 기억나지 않는 교가를 녹음까지 해 들려준다.


그런데 그때 그날의 민주야, 너는 지금 뭐하니? 그때 학교 옆을 흘러가던 3월 강물이 기억나니?


삼월에는 그 작은 냇물을 보살피세요,

강물이 흘러넘치고,

눈이 언덕에서 쏟아져 내려와,

다리들이 가끔 무너지는 때니까요.

-에밀리 디킨슨의 ‘당신의 작은 가슴속에 냇물이 있나요’


*에밀리 디킨슨책사모

도서출판 에이프릴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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