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죠, 다리미가 식어버렸어요.
고작 한 번뿐인 삶이 '사기'라고 누가 말하면 상투다. 그러나 사무엘 베케트가 하면 돌연 신선식품 코너 비닐랩을 두른 선홍빛 '붉은 살코기'로 바뀐다.
영어에는 '사기'와 연관된 말이 유독 많다. con(artist)man, fraud, swindle, snitch, scheme, 심지어 plot까지. 플롯을 짠다는 이 말이 어쩌면 가공식품의 그 유혹적인 발포색을 입고 여기 매일 당도하고 있다면.
사무엘 베케트의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의 원문에 '사기'는 불어로 정녕 뭘까 궁금하다. 자꾸 '사'자 들린 사람이 주변에 너무 많다고 그런 소리가 들릴 때마다, ‘눈꼽쟁이' 거울 하나가 나를 다단계 화장품 판매원처럼 이상하게 복잡한 방식으로 방문한다.
왜 고작 한 번뿐인 삶이 사기여야 하나요. 누가 알려 주세요. 혼자 중얼거리는 나에게 가문비나무가 뾰족한 바늘 하나를 떨어뜨린다. 불어 사전에는 fraude, tromperie 등 역시나 엄청 많다. 우리말은 또 어떤가. 협잡, 야바위, 농단, 기만, 낚다 등. 사기의 세계는 끝없구나.
코 끝에 공기가 '싸'하며 파동음을 낸다. 갔던 ㄱㅁ은행 창구의 셔터가 내려져 있다. 점포가 폐쇄된 줄 모르고 간 헛걸음이다. 이 헛걸음도 믿을 수없는 사기에 해당하는 것일까. 아기 돌반지를 팔아 만들었던 오래된 너덜대는 꿈어린이통장. 그걸 창구에 내밀며 일년에 한 번 돼지저금통을 깨던 시절은 있기나 있었던 걸까.
이 거짓말 같은 길 위에서, 빛들은 헐벗은 나무들에게 주유구를 들이민다. 그래서 이 거리의 이름은 주엽(注葉)일까. 빛들이 시든 잎사귀 위로 튀어오른다. 음식점 입구에 모형음식처럼 녹슨 기둥 같은 가로수에 초록이 펄럭인다. 고작 한 번뿐인 그 시절이 잠깐 왔다 간다.
이런 착시 속으로 마주오는 ‘감동상조’ 제복 입은 여자가 손이 곱은지, 주머니 속에 손을 넣으며 음료가 담긴 종이컵을 입에 문다. 어깨에 번쩍거리는 견장이 망토 밖으로 나온다. 죽음조차 이런 복장으로 보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요즘 유행하는 체리빛 루주를 바른 입술 주름이 흰 컵에 문양으로 찍힌다. 아코디언 같은 입술 주름. 이 생의 많고 많은 주름들, 주름의 협곡들.
횡단보도를 건넌다. 가끔 들르던 '착한 빵 이야기'도 브라인드가 내려있다. '계란과 국산팥의 가격 상승으로 더 이상 점포를 운영할 수 없다'는 주인의 손글씨 쪽지가 붙어있다. 마지막 떨림으로 자꾸 덧칠된 볼펜 자국이 뭉개지고 번져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하던 사람들이 무너져도 되는 걸까. 콧잔등의 주름을 접었다 편다. 이 민망과 수치의 주름들, 이 주름의 사구들.
동구청로의 가로수는 2월의 어느 하루에도 은행을 떨어뜨린다. 언 알갱이가 물컹하게 밟힌다. 껍질 벗겨진 노란 화석들이 돌멩이처럼 따라온다. 그 지치지도 않고 따라오는 냄새가 삶의 직설적인 오후를 끌고간다.
설마중이라는 간판을 걸고있는 ㄹㄷ백화점 건너 미관광장에서 발을 멈춘다. 벤치에 눈사람보다 더 두루뭉수리한 여자가 검은 비닐 보따리를 부둥켜안고 누워 있다. 건물의 그림자가 그녀를 덮으려다 비켜준다. 다행이다. 햇빛에게 그녀를 한때라도 덮어주라고 건물은 마음 한 뼘을 내준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니, 벤치는 어느덧 거리의 사람들이 눕지 못하게 세로목을 덧대 삼분할된 것으로 개조되어 있다. 심지어 대못 같은 걸 박은 것도 있다는 걸 들었는데. 왜 잠시라도 편히 누워 쉬면 안되는 걸까. 누워있던 그녀의 등은 얼마나 배길까. 이 곤혹과 난감의 주름들, 그 한 때는 사랑했던 나의 주름치마들.
아휴, 이 세상이 야바위꾼 같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야지. 그런데 어디선가 난폭한 파도의 철썩 소리가 난다. ‘엄마, 나 취업에 성공했어', 청년 취업페어 광고용 현수막이 광장을 건너오던 바람에 부풀렀다 펴지며 내는 소리다. 오늘 아는 사람의 아들은 이름도 외울 수 없는 '더비스트로 ㅈㅅ’으로 개업 준비 12시간 알바를 하러 갔다고 한다. 그곳의 새로 붙인 타일은 얼마나 아름답고 깨끗할까.
덜컥 세상에 달려있는 모든 셔터가 떨어진다. 떨어지는 건 세탁소의 셔터만이 아니다. 영혼의 세탁소에는 다리미가 차디차게 식어있다. 자꾸 이런 나를 들여다 보면 어느덧 겨울이 거울이 된다. 겨울 아닌 거울. 그 거울의 미간에도 잔뜩 걸린 주름들. 기계주름이 빼곡한 내가 한때는 넘 사랑했던 주름치마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
사무엘 베케트 저 |전승화 옮김/workroom(워크룸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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