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순한 마음

-진눈과 깨비 사이

by 시인 이문숙

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

-문태준 ‘비가 오려 할 때’


비 오는 ‘어떤 아침any morning.’ 벽 속에 번져가는 푸른실 곰팡이. 의자에서 황금빛 폭포로 흘러내리는 이불과 흰 바위 같은 베개. 이 쇠난간 침대에는 누가 누워있던 것일까. 마가렛 바커의 이 그림을 보면, 데이비드 호크니를 보러가고 싶다.


클라크라는 남자 맨발을 보러. 정말 호크니가 발가락을 그릴 능력이 없어 발가락을 카펫 보글대는 털 속에 파묻었는지. 발가락 없는 맨발과 손가락 없는 손. 우산살 없는 우산과 난간살 없는 침대.


이 아침의 지루한 루틴들이 그림 속에서는 무슨 신화 속 한 장면 같다. 침대를 정리하고 시트를 갈아내는 일. 무슨 공물을 바치는 의식 같다. 너무 경건하여 민숭하고 낯설기까지 하다.


저 우아하고 정연한 몸짓. 깊은 참을성과 온순한 마음. meekness라는 단어가 이미지로 실현된 듯한 어떤 자세와 태도.


비가 오려 할 때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

-문태준 ‘비가 오려 할 때’


그림 속에서는 오래 앓았던 어떤 이의 숨소리가 벽에 스며있을 것 같다. 어떤 이의 울음이 꾹 눌려 있는 것 같다. 높은 침대 난간살과 다시 펴지는 하얀 침대 시트.


먼저 온 빗방울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문태준 ‘비가 오려 할 때’


벽에 걸린 액자 속 둥근 아치는 둥근 우산 같다. 둥근 우산이 막 떨어지는 첫 빗방울을 경건하게 받쳐드는 어떤 아침.


방문을 활짝 열고 층계참에 서 있는 여자에게 저 그림 속 여자는 어떤 얘기를 하고 있을까. 그 너머 격자 유리 창문 속에 호젓이 서있는 나무는 지난밤의 어떤 폭풍우를 증언하고 있을까.


키 큰 주황빛 원피스의 여자가 전신을 기울여 하얀 시트의 양 끝을 잡고 맞은편 여자가 잡아당겨 아직 평평히 펴지기 직전, 손을 꾸욱 눌러 닦아야 할 저 이유 모를 눈물이 벽의 습기로 번질 때.


나는 서랍 속에 방습제처럼 웅크린다. 꾸욱 눌러 눈자위에 흐르려는 그 어떤 물방울에 대해 고해한다. 매일 맞이하는 그 지겨운 아침의 시작과 죽음에 대해.


나는 아직 멀었어. 이러한 아침은 어떤 자책을 흑염소처럼 끌고 온다. 확 바깥으로 제껴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에게 나의 늑장과 나태를 보고하게 한다.


비가 오기 전 후텁치근한 열기를 박차고 일어나 집안일할까, 아님 나가 걸을까. 사월 비가 진눈깨비로 변하는 순간이 좋아. 진눈과 깨비 사이에 간극을 사모해.


일상은 차츰 진눈과 깨비 사이에 있는 것. 저 시트의 팽팽하게 당겨지는 한 순간을 열무밭 위에 펼쳐두는 것. 진눈과 깨비 사이에 놓아두고 절뚝대며 걷는 것. 다시 소심한 공증인처럼 아침을 증언하는 것.


사월 비가 연약한 사슴을 두들기고 사월 비가 돌담을 무너뜨리고 그러나 사월 비가 다시 열무밭을 푸르게 할 때, 사월 비가 눅눅한 침대 위 시트를 빳빳한 시트로 다시 갈아내게 할 때. 창 밖 나무에 안녕, 아침 인사를 건넬 때. 당신의 머리맡에 새 베개를 놓을 때. 여자의 풀빛 원피스와 침대보의 세 줄 초록빛에서 넘실대는 청보리밭을 볼 때.


절름발이 학수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

-문태준 ‘비가 오려 할 때’


*문태준, 맨발, 창비


#문태준시인#사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