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모양빵
황량한 폴이라는 가명으로 모임에 참석했다
-윤대현의 '황량한 폴'에서
오늘 '흐엉은 아오자이를 입고 자전거를 탄다. 식민植民의 나라에선 흐엉은 ‘아무것’, ‘무無’라는 뜻도 가진다.
호치민에서 25. 9km 떨어진 시골이다. 바구니에는 앵무사과망고가 다섯 개 들어 있다.
‘아무것’은 바닥에 주저앉아 바구니에 야자수 잎사귀를 깔고 앵무사과망고를 판다. 그러다 ‘아무것’은 까막 존다. 졸다 파르락 깬다. 새파란 침이 흘러내린 아오자이는 그러나 여전히 흰 아오자이이다. 흰 ‘아무것’, 흰 ‘무無’이기도 하다.
앵무사과망고는 바구니에 세 개뿐이다. 잠깐 조는 사이, 한 개는 장터의 아름다운 여인 오필리아가 저만치서 먹고 있다. 손가락에 꾸덕꾸덕 말라가는 태양의 과즙. 하나는 누가 가져갔나. 앵무사과망고는 밀고도 감찰도 미행도 안되는데.
한 개는 그냥 먹는다. 과육은 붉고 노랗고 푸르덩덩하다. 팔리지 않은 두 개는 다시 바구니에 담는다. 자전거 바퀴는 하얀 아오자이를 입은 '아무것’을 텅텅 흰 ‘무無’로 굴려간다.
그집 식탁에는 오직 딸기쨈 병 하나가 놓여있다. 아직 입술모양빵은 화덕에서 익고 있다.
그는 이래저래 다른 이름으로 그녀를 전환해 부른다. 어느 날은 '흐엉, 아무것’이다. 사실 그녀는 실문silmoon, 자칭 '흰비단 달silk moon’이건만. 그런데 그는 혀가 짤다락해 발음이 안된다고 '띨문'이라 한다. 맞다. 그녀는 띨띨한 휘영청의 그 '달' 맞다.
세례명은 에우제니아인데 길어서 기억 못한다. 그래서 '프란체쑥'이라 부른다. 그가 아는 유일한 성인이 프란체스코라서. 맨발의 며느리발톱 같은 이름들.
밤가시말 초가집에 살던 청색 제복의 수녀, '작은 마리아'들은 촛불 아래 기도만 한다. 이래저래 말은 하지 않는다.
오직 딸기 농사를 짓고 딸기쨈을 만든다. 밤가시말 밤나무의 화력은 은근하여 밤나무 장작으로 졸인 딸기쨈은 맑고 투명하고 뭉근하다. 가난, 청빈, 노동을 같이 병에 밀봉한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입술이 벌어진 입술 속으로 들어간다
화덕에 불어넣어진다
-윤대현의 '황량한 폴'에서
식탁 위에 오래된 딸기쨈 병이 굴러다닌다. 뚜껑이 잘 열리지 않는다. 접시에 놓인 입술모양빵이 달삭대며 기다린다.
70년대 유일한 통학 기차, 경의선 화물칸에 주저앉아 그녀 ‘아무것’, ‘흰 무無’와 같이 화물 보따리 사이에서 졸고 있는 마리아들, 청색의 샌들과 청색의 머리수건. 그리고 까무잡잡한 흙의 맨발. 까무잡잡한 얼굴의 '흐엉.’
그녀는 그를 이래저래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어느 날은 양파농사나 지으며 틈틈이 책을 읽다 양파냄새에 취해 잠자는 게으름뱅이 '름뱅'이 된다. 잠 한가운데서도 통통 공을 튀기며 잠꼬대한다.
'급한 물 위에서 공을 친다.’
-벽암록에서
물 위에서 통통 공이 튄다. 통통통통. 책 밖으로 활자가 같이 통통통통.
름뱅은 동사무소 원어민교실에서 영어 이름을 지으라니 급하다. 급한 물 위에서 통통통통. 벼룩처럼 통통통통. 급기야는 ‘정신의 어부’ 바오로의 행적이 좋다고 '폴paul'이 된다. 원더폴, 뷰티폴, 그레이스폴, 너스레를 떤다. 그러나 그녀가 깔깔 웃으면 모른 척 시치미한다.
여직 2월 7일인데, 베란다에 황금 메리골드가 피었다고 어서 보라한다. 딴청한다. 다 죽었는지 알았던 화분에서 노란 메리골드가 통통통통.
통통통의 딴청. 이런 딴청은 닮고 심지어 옮겨오고 싶기도 하다. 어디로 튈지 예측을 비껴가는 딴청. 딴청이라는 말에 새로움을 부여하는 하얗게 부서지고 말 ‘흰 무無’인 물의 어록.
그가 풀밭에 혼자 있다. 혼자 화덕에 빵을 굽는다. 혼자 시를 쓰고 책을 읽는다. 황량한 폴.
빵은 황량한 폴을 삼켰다
- 윤대현의 '황량한 폴'에서
여기 딸기쨈이 놓여있는 작은 테이블이 있다. 소리없이 달삭대는 입술모양빵이 있다.
입술모양빵이 흘린 말 부스러기가 있다. 부스러기는 치워도 치워도 그 자리에 있다. 콕 찍어내도 그 자리에. 우리가 한때 나눴던 부스러기의 말들. 물에서조차 빠지거나 가라앉지 않고 통통통통 튀는 공의 말들. 물이 되려 공을 쳐올리는 가역성의.
입술모양소파에 안긴 부득이한 사람처럼 입술모양빵은 그의 진흙 화덕에서 부풀어 공처럼 통통통 튄다.
언어총회로 언어의 응접실로 ‘아무것’들을 초대한다. 흰 접시 위 언어의 공은 시연한다. 이 육중한 세계에서 어떻게 튀어오르는 것이 가능한가. 어떻게 입술모양빵은 화덕에서 달삭되는가.
그걸 보던 모든 ‘아무것’, ‘흰 무無’는 묻는다. 어떻게 당신은 그런 걸 할 수 있는 거죠. 믿을 수 없어요, 정말.
*언.어.총.회 경기문학-10
금은돌 등 저 | 테오리아 |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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