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오랗
호스피스 정문에 과일이 왔어요 과일 소리치는 트럭이 도착하면. 시의 제목이다. 일명 김혜순 시인의 ‘호정과트도’
신호등 노랗. 비닐 봉지봉지 노오랗. 과일이 왔어요트럭노점상, 봉지봉지 길가에 담아논 참외 샛노랗. 노오랗 참외를 보면 이제 아프다. 어깨가 결리고 담이 든다. 어느덧 노랗 ‘참외'를 보면 노오랗 ‘참회'를 하게 된다.
어스름녘, 노랗 달이 수천 개 뜬 참외밭 원두막에서 혼자 뒹굴며 황홀했던 어린 나. 물이 잘 빠지는 땅에서만 재배해야 하는 참외. 그래서 진정으로 참회하려는 자는 눈물의 배수지가 안에 있어, 밖으로 잘 흘려보내지 않는지도 몰라. 눈물 흘리지 못하고 눈물샘에 고이기만 하는 가로 1m, 세로 1m 좁다랗고 옹송대는 원두막 위에서 혼자 둥둥.
오늘 다시 본다. 그 원두막 비슷한 정자가 있는 연못 난간에 새겨져 있는 이런 글귀. '연숙, 이곳에서 참회하다 2013.10.6.’
원두막의 움막의 우편물의 소포의 호스피스의 병상의 휠체어의 노오랗.
링거대에 호박 수박 참외 매달고, 휠체어에 지팡이 매달아 밖으로 달려 나오고-김혜순 ‘호정과트도’
'참회懺悔'라는 말의 '참懺'에는 사람 '인'이 두 개. 참회하는 사람과 그것을 받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참회는 이루어진다는 것일까. 그럼 나는 참외에게 참회를 바쳐야 하는데 어떡할까 몰라.
'유나바머Unabomber, university and airline bomber' 선언이란 걸 어디서 읽은 적 있다. 25세에 버클리대 종신교수가 되었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와, 몬태나 두메산골에서 수도도 전기도 없이 모든 공공체계를 거부하고 가로 3m, 세로 3.6m 움막에서 20년 동안 소포폭탄을 조제한 천재 수학자 시오도오 존 카진스키Theodore John Kaczynski(1942.5.22~).
연숙은 이곳에 와 무엇을 참회했을까. 쑥떡이나 사과파이 같은 걸 숨겨놓고 먹으면서 엄마 앞에서 툭하면 단식투쟁한 일. 가로등 관리번호 '외곽 17-2'의 '외곽'을 '와락'이라 잘못 읽고 그 아래 서서 그 불빛 아래 와락 안겨본 일. 감전위험이라 쓰인 물그림자를 헤집어 말라가는 타래붓꽃에 물 준 일. 강가에 가지 말라면 기어이 강가에 가 조약돌을 줍고 우물에 가지 말라면 우물에 가 두레박을 첨벙댄 일.
카진시키는 문명혐오주의자로 78년부터 95년까지 20여년 동안 16회에 걸쳐 과학기술과 컴퓨터 종사자에게 우편물 폭탄테러를 감행한다.
연숙은 이곳에 와 무엇을 참회하려 했을까. 머리가 아픈 일이 생기면 폭탄은 제조하지 못하고, 유리병 속에 '머리'를 떼어두고 당장법이나 염장법으로 보관하려 한 일. 농협특판장에서 머리 떼낸 '거두콩나물'을 발견하고 맞다, '거두'하자며 나를 합리화하고 문제를 외면한 일.
대학University, 항공사Airline와 폭파범Bomber의 조합인 유나바머.
소포폭탄 테러로 3명이 사망하고, FBI의 추적을 받던 그는 95년 테러를 중단하는 조건으로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지에 3만5000자의 과학기술문명비판논문을 싣는다.
좌뇌와 우뇌의 역할은 어떻게 다를까. 참외는 슬픔을 내장하고 있어 달콤해. 우뇌가 꽃범의 꼬리로 포착하고 감지한 슬픔. 슬픔의 우멍거지를 걷어내고 참외를 보니 참외는 쉽사리 굴러가지 않게 흰 줄무늬 홈을 가지고 있네. 물이 배수되지 않는 슬픔의 밭에 자주 굴러내린 참외는 무향. 싱겁고 밍밍하고 향긋하지 않아.
호스피스 할머니들 몸속에서 씨앗이 터지고 그 씨앗들 마음 급해 우선 꽃 같은 미소부터 침대마다 피어-김혜순 ‘호정과트도’
유나바머는 동생 데이비드의 제보로 96년 4월 체포되어 감형 끝에 종신형을 선고 받고 현재 복역중.
엉터리 털레기 국수 같은 생각들을 다시 참외 원두막에 붙들어 매고, 수천 번도 변하는 머릿속 생각의 청산녹수를, 녹의홍상을, 그 펄럭대는 홍부전나비를 참회합니다. 이 내노라하며 거들먹거리는 유원지의 행락객들의 대형항공의 후마니타스의 호스피스 병동의 6인실의 집중치료실의 1인 독방의 이코노미석 E-365의.
참외를 보면 참회하고 싶다. 지지리 못난 참회. 참외보다 더 샛노랗. ‘침대를 믹서에 갈아’ 망각하게 하는 노랗 ‘망고忘苦’ 주스를 하얀 침대 보에 흩뿌리고 엎지르며.
이 호스피스 병동 세계에 유나바머가 되고 싶다. 아니 그렇게는 못 되도 노오랗 참외 하나라도 투척하고 싶다. 호스피스 병동에 과일이 왔어요 참외폭탄 제조자.
세계는 점진적으로 노오랗 어질머리하고 이제는 멀리 놀러갈 궁리도 있지만, 반문명의 내 안으로 놀러가 유희를. 얼음 양동이 뒤집어 쓰듯 탄소발자국 0.000000. 호스피스 병동 할머니처럼 참외 씨앗으로 맺혀 침대와 정맥주사, 심장박동기, 콧줄을 다 넣고 갈아버리는 ‘믹서’ 놀이. 어떤 열대과일 주스를 드릴까요. 4년 혹은 10년 죽은 듯 누워계신 엄마.
(수학자는 이따금 시인) 그들은 괴이한 꿈을 꾸지 않고 바로 ‘거두’하고 실천한다. (허준이 필즈 상) 그 소식에 오늘은 유나바머가 노오랗 궁금하다. 잘 복역하고 있는지, 지금도 대학과 항공을 어질머리하고 있는지. 이 만화방창 호스피스에 대해선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호스피스는 다시 하얀 암전-김혜순 ‘호정과트도’
이 ‘하얀 암전’에서 자퇴하면 노오랗. 노랗 시를 볼 수 있다. 더러운 비둘기똥으로 문질러 금보다 존귀한 샤프란으로 노오랗 염색할 수 있다. 샤프란 1g을 얻기 위해서는 500개의 암술을 말려야 한다는데, 당신은 박하 잎을 코에 쥐고 이 노랗 시를 읽거나 쓰기보다 매일의 셔츠, 치마, 슬링 백으로 입고 걸칠 수 있길.
과일이 왔어요 소리가 울리면 호스피스 병동의 날개 망가진 ‘흰 고니’ 할머니들이 매달고 있던 링거병을 폭탄처럼 투하하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살강살강 노오랗 참외를 물풍선으로 터뜨리며 물에 흠뻑 젖은 소녀들처럼 까르륵 웃는 소리. 들려요. 들리나요. 호스피스 병동을 폭파하는 호스피스바머들.
유나바머에 호스피스바머를 합치면 뭐가 될까. 유나호피바머.
과일트럭이 왔어요 맛좋고 싱싱한 참외가 왔어요. 참외폭탄이 왔어요.
*조르조 모란디 Giorgio Morandi, Natura morta, 1941
* 수학자들은 시인, 허준이 필즈 상
*김혜순,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문학과 지성사/2022
#김혜순시인 #지구가죽으면달은누굴돌지 #존경하는한국여성시인들 #나이들어도시는잘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