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녕하세요
정발산역에 앵무 있다. 아니 없다. 어느날 사라졌다. 개찰원이 유리새장에 넣어 사육한 앵무. 모이통엔 좁쌀 몇 알. 앵무는 노란 앵무. 월화수목금퇼, 내가 매일매일 밥 벌러 피랍의 길을 떠날 때, 앵무는 늘 앙녕하세요. 앙녕하세요.
너는 누구야 묻지 않았으나, 매양 너는 누구야라고 묻는 듯한 쇠구슬 눈. 횃대를 꽉 말아쥔 발가락.
앵무는 몇 개의 단어로 하루치의 버릇을 벗는다
너는 누구야 아무것도 아니야 사라지는 농담이야
-이기인 ‘앵무’
7시 27분 이 전철을 놓치면, 나는 지각이야. 지하계단이 땅속으로 솟은 에베레스트 설산 같아. 그 산도 이만큼 가파르니. 수천 개의 계단을 뛰어내릴 때. 앵무는 늘 같은 음색, 같은 음조. 앙녕하세요. 앙녕앙녕. 말을 버린 음소만 남은 비음. 그 비음 속에 수수께기. 안녕이 정확히 못된 앙녕.
말을 버리고 소리를 배우는 조롱 속에서 머리를 가슴에
수수께끼를 모이통에 넣어주듯이
-이기인 ‘앵무’
정발산역에는 이제 앵무 대신, 선인장. 노란 선인장. 퇼퇼퇼. 토요일 일요일조차 퇼이 되버린 이 남루하고 비천한 나날들. 나는 그때 오금행 전철문이 유빙처럼 콰르르 와 닫히기 직전, 간신히 앙녕하곤 했네.
그러면서 헉헉대던 숨을 선반에 내려놓고 잠깐 이런 문장을 빚어 그 앵무에게 앵무의 모이통에 넣어 주었지. 그래두 나는 미천한 왕이 아니고 늠름한 노예야. 앵무야, 노란 앵무야. 우리는 항상 강녕하지 못하나 늠름하고 졸박하지.
오랫동안 가르치지 않는 말을 쏟아 놓는다
너는 누구야 아무것도 아니야 사라지는 농담이야
-이기인 ‘앵무’
앙녕하세요. 앙녕하세요. 사람들은 바쁜 피랍의 길을 멈추고 앵무의 말을 듣지. 앵무는 노란 앵무. 기특한 앵무. 조롱조차 흐뭇하게 하는 앵무. 양철북처럼 쨍하게 하루의 안부를 물어주던 앵무. 앵무야 너두 앙녕앙녕해야 해.
농담을 이어붙이는 앵무가 이상하다
안녕하세요 진짜로 안녕하세요 사라지는 느낌도 안녕하세요
안녕은 두 마리로 갈라지는 농담이야
-이기인 ‘앵무’
그 앵무가 사라졌다. 유리장엔 마른 물 종지. 먹이통에 좁쌀 몇 알. 기시감으로 남은 새똥 서너 알. *인생의 굴레와 곤궁과 실패, 걱정과 근심, 그걸 선인장 가시처럼 얼굴에 끌어붙이고 월화수목금퇼 아전의 길을 갈때. 노란 선인장 얼굴에서 가시가 흘러내릴 때.
수천 번의 앙녕하세요가 고단했겠지. 수만 번 앙녕에 진력났겠지. 그러다 시름시름한 앵무.
월요병을 나두 겪고 있어. 이상하게 퇼퇼퇼 토욜 저녁부터는 왜 그런지 불안한 식은땀. 악몽으로 반짝이던 날개의 퇴색. 수치스런 수요일 간신히 건너면 수없는 앙녕앙녕. 목요일 목울대가 아팠겠네. 금요일은 사라지는 느낌.
과로한 앵무. 그러다 실어증에 걸린 앵무. 아무도 쳐다보지 않자 가면우울증을 앓게 된 앵무. 횃대는 이파리 하나 없는 죽은 나뭇가지. 그렇게 사라진 앵무.
앵무 대신 다육이 선인장이 차지한 그곳을 가끔 가서 앵무의 말을 들을 때. 한때 미천한 노예였으나 이남루는 결코 비루를 닮지 않았네. 뛰어내리던 수천의 계단은 하얀 왕관의 에베레스트가 꺼꾸로 솟은 지하 승강장으로 가는 길이었고, 전철의 굉음 속으로 앵무는 노란 앵무. 여전히 우리에게 안부를 묻고 있네. 농담처럼. 사라지는 느낌으로.
앙녕하세요.
앙녕하세요
앙녕앙녕
앙
ㅇ
‘ㅇ’마저 떨어져 나간. 앵무는 앵무. 앵무는 노란 앵무. 앵과 무 사이로 갈라지는 농담이야.
*Frida Kahlo, Me and My Parrots , 1941
*이기인,혼자인 걸 못 견디죠/창비
#이기인시인 #이문숙시인 #앵무
*선글라스를 낀 앵무
이문숙-시집 ‘한 발짝을 옮기는 동안’에서
앵무를 보러 간다
지하철 유리장에 사는
*인생의 굴레와 곤궁과 실패, 걱정과 근심,
이 미천한 아전의 길을 모르는 앵무를 보러
죽은 나뭇가지 한 자락에 감아 올린 발가락
물 한 종지와 좁쌀 한 그릇 지하철이 우르릉 지나가면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올리고
쯧쯧 첫첫 혀를 차는
노란 깃털에 푸른 기운
파란 선글라스를 끼고 한 상 가득 차려진 진수성찬을 보면
상한 듯 푸릇푸릇 싹 입맛이 가신다는데
찰랑한 물 한 종지는 늘 그대로이고
낟알 좁쌀알은 부서지고
쯧쯧 첫첫 상인은 그 앞으로 무작정 상인의 길을 가고
피랍자는 피랍의 길을 가고
앵무는 앵무의 길을 가서
온 세상이 푸른 기운에 뒤덮힌다
앵무는 죽은 나뭇가지에 발을 걸치고
멀리서 밀려오는 막연한 진동음을 듣는다
그때는 거친 회오리도 같이 솟구쳐서
쯧쯧 첫첫 지하철 바퀴에 몸을 던지고도 싶은
앵무는 노란 앵무
세상은 진기한 음식으로 그득하고
냉철한 지하철은 여전히 인간을 실어 나르고
이 영원한 피랍의 길
먹이를 갈구하지 않는 앵무는 비썩 야위어서
*이규보의 ‘꿈에서 본 슬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