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테라

-톱상밍크고래

by 시인 이문숙

초코파이를 받았다

피를 뽑고 약해질 때마다

착해지는 기분이 된다

-조온윤 ‘원주율’


세상의 우툴두툴한 톱상무늬를 찾아본다. 먼저 채혈실 대기실 의자. 두려운 생각에 맨손바닥을 그 톱상무늬로 쓸어보니 가슬가슬하다. 따끔따끔하다.


피가 몰리며 빨갛게 모르는 방향이 생겨난다. 잠깐 정신이 들며 몸 속에 든 지구 세바퀴 반 혈관을 도는 기분이 든다.


팔을 높이 들고 계시오. 심장보다 높이요. 그렇게 팔을 들고 지혈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


십자가에 한 팔만 못 박힌 기분이다. 어깨탈골과 쇄골하동맥의 과다출혈로 이 세상에 빛 대신 고통을 뿌리신 분. 그분.


수간호사가 당신이 승리자라는 듯 왕관표 카스테라를 심장보다 높이 들고 있는 손에 쥐어준다. 미필적 고의. 채혈하던 마음을 부드럽게 옹호하며 카스테라가 십자가처럼 들린다. 순간 카스테라 톱상무늬 비닐봉지 테두리가 광휘에 휩싸인다. 반드시 여기를 뜯으시오. 거기 금색 줄 하나가 기도처럼 있다.


검은 안대를 끼고 흰 지팡이 들고 맹인 체험을 하듯 ‘그분’ 체험을 한 기분이다. 못 박힌 한 손으로 카스테라를 뜯으며 채혈 대기실 의자에서 바라본다. 건너편 벽에 걸려있는 오래된 액자 속 돛. 돛 마악 부푸는 배. 격랑을 두려워 하지 않고 출항의 기쁨을 선사하는 신성을 돋을뛰기하는 초신성의 배.


상처를 솜으로 막아 피를 굳게 하는 동안엔

모두가 조금씩만 아파주면

한 사람은 아프지 않을 수도 있지 않냐고

-조온윤 ‘원주율’


발 아래로 람람람 물이 차오른다. 먼저 톱상어가 온다. 톱상어 날카로운 이빨로 세계를 뚫는다. 그 뒤 부드러운 밍크고래가 온다. 비워지고 약해지면서 착해지는 순간. 채혈은 잠깐 아프지만 새 피가 오는 느낌.


초코파이와 오렌지주스는 맛있고 누군가는

상냥했다

상냥한 사람이 되기까지 고통스러웠을 수도 있다

-조온윤 ‘원주율’


톱상밍크고래가 흘러오는 시간이다. 세상에 그런 존재는 없지만 사실 그것은 톱상어와 밍크고래의 합성어.


어느날 채혈 대기실 톱상무늬 의자에 맨손바닥을 쓸어보다가, 문득 혀가 밀어낸 말. 부드럽게 으르렁대고 있는 상냥이라는 냥이의 말. 스스로 약자가 된 이들의 깊고 조용한 말.


그런 날 아이는 5년간 기른 머리를 자른다. 허리까지 머리칼이 닿을 때, 그걸 잘라 상자에 깨끗이 담는다. 조혈모세포가 부족한 백혈의 아이에게 기증하는 소포를 부친다.


한때 나의 것이었던 것들아. 건강한 머리칼을 만들기 위해 나쁜 음식도 끊고 계면활성제 샴푸도 끊고 애썼던 톱상어의 지난한 시간들아, 잘가.


아이는 울지 않는다. 지켜보던 내가 울컥한다. 짧은단발의 아이는 머리칼이 가벼워지니, 목도 어깨도 가벼워져 결국 백혈의 아이들이 자기에게 큰 선물을 준 거라고 한다. 인공향 첨가된 오렌지주스 향기에도 머리칼은 나부끼고.


아이의 발목으로 물이 차오른다. 물이 람람 차오른다. 부드러운 밍크고래가 온다. 내 몸의 일부를 싣고 떠날 돛배가 그것이 머리칼이든 피든 심장이든 날카로운 이빨의 쇠톱이든 톱상어가 지나간 자리 부드러운 밍크고래와 함께. 톱상밍크고래와 함께.


* Edgar Degas, Three Women Combing Their Hair

*조온윤, 햇빛쬐기/창비/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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