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눈죽

-동사무소식 이별

by 시인 이문숙

동사무소는 간결해

시작과 끝이 무한해

-이장욱 ‘동사무소에 가자


‘모닝스페셜'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편지를 보내는 아침이네요. 거기 '모닝죽 이벤트.’


동사무소 영어교실에서 나눌 모닝죽 아닌, 사실 저희 수업은 오후 2시 10분이니까 '애프터눈죽’'이 되겠지요.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점심이란 말도 좋지만, 애프터눈죽도 살살하네요. 저는 요즘 유행하는 줄임말처럼 '눈죽'으로 줄여 부를까해요. 서로 눈 꼭 맞추고 먹는 눈죽. 납일의 눈섞임물 같은 흰 죽.


천천히 혀와 입천장과 혓바늘을 생각하며, 맨도롬히 퉁퉁거렸던 목울대를 찬찬이 넘기며, 반짝 시득했던 촉수를 깨우는 죽. 거기 눈치채지 못했던 식도가 있고, 눈밝은 림프샘이 있으며, 나비 모양의 갑상선이 흐르는 걸 일깨워주는 죽.


이제 일어나 걷고 숨쉬며, 공기 속에 있는 '정신의 맛'을 돌올하게 해주는, 개다리소반에 간장 한 종지와 흰죽 반 공기. 짤랑거리는 악기 말고 촐촐한 창자의 송가hymn를 들려주며, 영아의 배 위에 모래톱 같은 자잘한 주름을 새겨주는, 죽죽죽죽죽 무의미하게 그어내린 낙서의.


그 또한 모이면 하루가 되리라. 태양을 지고가는 쇠똥구리 또는 구멍 뻥뻥 뚫린 두더지 덤불언덕. 침묵의 가시풀에 등 부비고 자도 나쁘지 않을.


저는 죽 가운데 깨죽도 아니고 백합조개냉이죽도 아닌 잘 영근 앰버amber 빛 호박죽을 신청했어요.


다들 봄의 바람꽃이 오고 있다는데, 곧 삼월의 버들개지라는데, 저는 늙은 호박으로 만든 호박죽으로요. 오는, 오고 있는, 달아날 봄 속의 가을 냄새가 큼큼 맡고 싶어서요.


여름 땡볕 아래서 이브 몽땅의 '고엽'을 듣듯, 한껏 달아오른 아스팔트 보도 위에서 건물이 뜨거운 대기에 흔들리는 걸 보며 크리스마스 송가를 듣듯. 땀은 빨뻘하다 서늘하게 맺히고요. 8월에 미리 듣는 늦가을녘 고엽도 어쩐지 좋았어요.


서류들은 언제나 낙천적이고

어제 죽은 사람들이 아직

떠나지 못한 곳

-이장욱 ‘동사무소에 가자


여름 속으로 설레발치며 먼저 온 가을. 우거진 땡볕의 푸른 녹음 속 고엽. 봄의 앰버 빛 호박 속에는 황금평의 가을 낟가리가 마구마구 쌓여 있어요. 거기 누워 맡는 아주 낙천적인 짚가리 냄새.


어제는 싸락눈, 진눈깨비, 검정 강아지 흰 점박이만한 눈이 섞여내리고요. 봄이 날도둑처럼 와 잘 익은 호박 한 통을 부려넣고 갈 때.


오늘 영어교실 토픽은 'money can buy happiness'이네요. 비틀즈의 'money can't buy me love'와 함께. 친구 유나가 뽑은 브레킹 뉴스breaking news 중 하나예요. 요즘 우리는 코티졸 cortisol같은 이름의 이상한 호르몬에 대한 얘기를 너무 많이 했거든요.


옛날 엄마가 어디 갈 때 바르던 코티 분도 아니고 코티졸요. 코티졸은 스트레스 호르몬이라 어떻게 이 스트레스를 풀어야 할까 이런 주제는 좀 힘들어서요


오늘은 누구의 엄마도 옆사람도 누나도 이모도 아닌, 학생 문Moon으로 이 편지를 쓰는 이월 이십삼 일입니다. 저만의 흰 달력 위에 어떤 '상실의 맛'처럼', '선생님 카리나karina를 위해 앰버 빛 호박죽을 신청하다'를 23이라는 날짜 대신 일기에 적어봅니다. 코티졸이 코티 분이 되는 기적의 어릉어릉한 순간의 신기루.


사뮈엘 베케트의 전기를 쓴 나탈리 레제Nathalie leger가 '말 없는 삶les vies silencieuses de samuel beckett'에서 우리가 들이마시는 공기 속에는 '정신의 맛'이 배여있다고 쓸 때, '의기양양한 공허' 속으로 왔다가는 신기루의 맛. 비루와 고루와 남루의 누각에서 양산을 펴고요.


어제의 경험을 신뢰할 수 없거나

혼자 잠들고 싶지 않을 때

-이장욱 ‘동사무소에 가자


다음은 제가 보낸 편지의 전문이네요. 과연 당첨첨첨, 그 소식이 오기나 할까요. 사바나 지대에 여우비 올 확률.


<저는 고양시 원어민교실 일산3동사무소에서 캐나다에서 온 아리따운 28세 숙녀 카리나 머클 Karina Muckle 샘과 영어 공부하는 늦깎이 학생 문Moon이라고 하는데요. 카리나 샘은 키가 무척이나 큰데요.


머클Muckle이라는 성에는 조상이 키가 커서 'tall'이라는 뜻이 숨어있다네요. 그래서 그런지 늘 배가 고파하면서 점심을 거르거나 빵조각으로 때우는 게 늘 안스럽네요.


4월에는 고향으로 돌아간다는데, 돌아오는 2월 28일이 마지막 종강일이네요. 그래서 추억으로 모닝죽 아닌 애프터눈죽을 같은 반 친구들과 같이 나누며 담소를 나누고 싶은데요. 카리나 샘과 정말 점심, 마음의 점을 찍고 싶어요.


<I've grown fond of you, Karina>

카리나와 정이 들었어요. ‘정’이라는 말은 영어에는 없다는데, 우리는 미워하면서도 시간을 같이 보내다 보면 정이 들어버리지요.


두부처럼 조용한

오후의 공터라든가

그 공터에서 혼자 노는 바람의 방향을

자꾸 생각하게 될 때

-이장욱 ‘동사무소에 가자


단호박죽 10팩 신청합니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강선로 158 일산3동사무소

받는 사람 원어민영어교실 교사 카리나


카리나, 같이 이별의 애프터눈죽을 나눠요. 죽죽죽죽. 파란 눈동자에서 흐르는 죽, 검은 눈동자의 우물에서 고이다 마르는 죽죽죽죽. 기이하고 어려운 시절이라도 어떻게든 우리 죽지 말고 죽죽죽죽 잘 살아요. 하얀 두부처럼 말랑하고 조용하게요.


*이장욱, 생년월일/창비/ 2012


#이장욱시인#동사무소#베케트


-Nathalie leger ' 말 없는 삶'

-사진 '잘 익은' 호박빛 팻말에 토종씨앗 나무상자

- 사진 카리나가 사포로에서 찍은 눈 조각 '개선문arc de triomphe' 모두 지지 말고 승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