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식, 채식, 육식
두루미처럼 버쩍 마른 모습으로 시의 언덕바지에 살고 있었는데
-이제하의 ‘초식’에서
초식인 그분의 총명함으로 지루한 한 나절이 간다. 그가 쓰고 계신 주황빛 여성용 모자로 한낮이 간다. 시의 언덕바지가 쓰고 있는 갓 달린 등의 모자.
노발대발을 모르는 노래가 버성기며 노년의 눈에서 흘러나온다. 여전히 느긋하고 파릇파릇하시다. 낭독회에 고양이가 생의 멘토가 분명하리라는 시인은 오지 않는다.
이번 강추위에 공중목욕탕에서 고양이를 돌보느라 얼어붙은 머리라도 감고 오느라 늦을 거라는 시인을 기다린다. 시인의 집에는 겨울이면 수도가 얼어 세수도 못할 때가 많다. 심지어 온수 샤워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동안 그분이 시간을 벌어주시려 우리 발 밑에 깨끗하게 설운 노래 ‘모란 동백’을 뿌려 주신다.
시인을 기다리는 시간, 나른한 햇볕에 노래가 들락날락하는 사이, 그분은 지긋한 노년이며 소년의 심장을 가진 초식남이며 여성모자가 잘 어울리는 남자 어른. 아니 양성구유의 사람.
출마 때면 왜 초식을 해
-이제하의 ‘초식’에서
이런 초식의 지긋함이 이상하게 지긋지긋함으로 변질되려는 시간을 막아준다. 그분 말상의 얼굴 위로 '상냥한 얼굴'의 아가씨가 지나간다.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느라 얼어붙은 시인의 머리가 딸깍딸깍 지나간다. 고양이 시인이시여, 좀 늦게 와도 되니, 목욕 깨끗이 하고 와도 돼요.
지긋과 파릇은 서로 닮아서, 그분은 지긋하시고 파릇하시다. 지긋의 ㅅ과 파릇의 ㅅ을 닮아 ㅅㅅ하다. ‘ㅅ’은 풀의 싹이 포옥하고 오르는 모습을 생래적으로 닮았구나. 기다림과 조바심과 초조는 그분의 것이 아니고, 허우대 멀쩡한 우리의 것.
낭독회가 끝난 뒤 그분이 두고 가신 발 밑의 동백 하나 주워 온다. 툭툭 발치에 떨어진 빨간 잎 노란 꽃술.
동백꽃 하나를 주워오니 내가 좀 미친다. 줌파 라히리에 미치고 줄리안 반스에 미친다. 정지돈에 미치고 파스칼 키냐르에 미친다. 사무엘 베케트에 미친다. W.G.제발트에 미치고 아우스터리츠에 나오는 장미여왕 시동에 미친다.
공책에 일개미 흔적이 빼곡하다. 필경사 일개미의 미흡한 정신도 미친다. 삭제도 하고 첨언도 하며 좀 미친다. 공교롭게 밸런타이 데이에 뜬 대보름달은 개다리소반에 소소하게 해묵은 나물을 차린다. 그 앞에 앉아 우리는 다같이 초식남녀로 미친다. 마른 가지, 곤드레, 취, 호박, 피마자.
5층 다용도실까지 올라온 회화나무, 그 이름이 japanese pagoda tree라는 패찰을 이물재공원에서 본다. 가지가 사슴 뿔로 뒤엉켜 있다. 이 비슷한 학명을 매화나무 검은 줄기에서도 본 적 있다. 매화는japanese apricot였다. 모두 '일본의’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서양에서 보면 동양은 모두 일본의 본말.
초식에 가까워진 날에는, 가와가미 히로미에 미치고 아오이 유에 미친다. 영화 '메카네'에 나오는 기이한 해변 체조에 미친다. 쿠사마 야요이에 마루야마 겐지에. 이것들이 일본의 것이지만, 일본의 것이 아닌 조용하고 거룩한 것이어서. 초식의 것이어서.
모든 한시적 욕망과 슬픗한 기쁨과 이 환청과 환각, 환시에. 지긋하고 파릇한 초식남의 어법에. 이 결핍의 희끗희끗한 은발들에. 기여코 모자를 뚫고 올라오는 현자의 머리칼 새치에, 그 깨끗한 세 치 혀에.
소녀상 머리에 누가 손수 뜨개한 모자를 씌워놨다. 벙어리 장갑도 끼워두웠다. 마스크도 씌워놨다. 다정하게 미치다미치다미치다미치다.
육식은 증오와 혐오와 질투를 쭈욱 빨대로 빨아올려 세계의 컵을 우그려뜨린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것으로 한 땀 한 땀 슬픔과 애도의 뜨개를 한다.
홍매 청매가 오고 있나 나무를 올려다 본다. 그런 날에는, 빈센트 반 고호에서부터 훈데르트 바서까지 사랑한 우키요에에 미친다. 가와바다 야스나리보다 혼자 책 읽고 글씨 쓰는 설국의 정말 쓸모없이 무용한 헛수고 게이샤 '고마코'에 미친다. 청매는 푸르고 홍매는 붉어 조금 미친다.
주택가를 걷다 느닷없는 한 필지 밭에 누가 써붙인 건양다경, 입춘대길이라는 휘호에 미친다. 그러나 같은 길자 돌림인 풍신수길에는 미치지 못한다.
초식남녀들은 그 텃밭에 동백을 심는다. 휘영청 달밤, 떨어진 동백을 줍는다. 개다리소반에 나물을 무치고 미친다. 삼가하며 조심조심 달집을 태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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