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맡에 둔 씨앗

-이남호의 <혼자만의 시간>, 조은의 <벼랑에서 살다>

by 시인 이문숙

아주 어려웠던 시절 친구에게 넙적다리살을 베어 먹였거늘 지금은 잘 나가는 친구가 돌아보지 않는다면 세상을 버리고 *개산에 들어가 개자추처럼 살아라. 친구가 지난날을 후회하며 이제 나와 살자고 애원을 해도 들은 척도 하지 마라. 거기서 나오라 불을 지른다고 해도.


개산에서 개자추는 어떻게 살았을까. 처음에는 너무 분해 밤잠을 설치며 자기를 버린 세상을 저주했으리. 그러다 차츰차츰 개산에서 사는 것을 행복해 하였으리. 분노로 깜깜했던 눈이 푸석한 흙이 밀어낸 황금빛 두릅을 만나고 발자국에 걸맞는 짐승의 이름을 알아가면서 개산에서의 시간을 사랑했으리. 혼자만의 시간이 그의 상처를 치유했으리.

머리맡에 씨앗주머니를 매달고 잠들고 일을 끝낸 저녁 홀어미와 받는 밥상은 아주 달았으리. 밤에는 글도 적었으리. 개자추도 어머니를 위한 글을 썼을까. 글을 쓰고 나면 개산에서 유일한 독자인 홀어머니에게 읽어 드렸을까. 개자추는 어머니를 위해 어렵게 뒤엉킨 칡넝쿨의 말이 아닌 단촐하고 쉬운 뿌리의 말로 글을 썼으리.


이남호의 산문집 ‘혼자만의 시간’의 글머리를 읽는다.


조용함 속에서만 보이고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을 단정한 언어에 담고 싶었다. 조용히 창 밖의 세상을 응시하고 쓴 글이지만, 세상보다 나 자신이 더 많이 담긴 글이 된 듯하다. 지금까지 내가 써 왔던 글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싫지 않다. 어머님께서 읽으실 수 있는 책을 내게 되어서 기쁘다.

나는 오랜동안 글머리에서 넘어가지 못한다. 이남호도 이런 글을 쓸 수 있구나.(이남호는 여러 권의 평론집을 낸 문학평론가이며 대학교수이다.) 그가 문공의 언어가 아닌 살아있는 개자추의 언어로 글을 썼구나. 어머니도 읽을 수 있는.


그는 혼자만의 시간을 사랑한다. 책 앞에 나온 ‘고독한 삶보다 고독을 잃어버린 삶이 더 견디기 어렵다.’는 구절은 그의 이런 생각을 가름한다. 그의 연구실에는 항상 음악이 불려나온다. 그는 연구실의 문을 닫으며 음악도 가끔은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을 거라고 라디오를 끄지 않고 나온다. 그가 두고 온 음악은 텅빈 연구실에서 어떻게 하고 있을까. 그가 지루하게 읽던 책뚜껑을 접으며 맘껏 휘돌아 다닐까.

산문집 곳곳에는 혼자만의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그의 조용하고 꾸준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봐라, 이 빠른 속도의 세상에서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 넷망을 교란시키는 바이러스처럼 그는 우리에게 아주 미미하고 보이지 않는 즐거운 교란을 부추긴다.

그의 산문집을 읽는 동안 나는 내내 유치한 분식집을 기웃거린다. 벽에 선반처럼 붙어 있는 좁은 식탁에 마구 포개진 고추장 묻은 플라스틱 그릇들. 그 동그란 의자에 궁둥이를 붙히고 한끼를 때웠을 고단한 이들을. 혹시 그 분식집 아크릴 간판 속에 숨겨진 낭만이라는 이름의 조그만 카페에서 없는 듯 있는 듯 앉아 있는 이남호를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그의 글대로 <낭만>은 영영 없어진 것일까. 아니다. 그의 산문집 속에는 그가 궁금해 하는 낭만이 고스란히 이주해 있다.

일년 중에 무덤덤하게 끼여 있는 유월, 그는 거기에서 60년대 고적한 골목길에서 나는 재봉틀 소리를 듣는다. 도연명의 줄 없는 거문고에 빗대여 이규보의 거문고처럼 줄을 매고 ‘가느다란 명주실에서 소리를 구하는’, 자신을 굳이 변명하려드는 섬세한 마음의 결이 곳곳에서 접촉된다. 접속이 아닌 ‘접촉’의 올록볼록함.

자신이 사는 연립주택에는 그가 삼덕이라고 이름 붙여준 플라타너스 나무가 있다. 어느날 사람들이 전깃줄에 엉킨다고 전기톱으로 삼덕이를 잘라버린다. 나무의 죽음을 보며 마음이 가파라지는 그는 정말 시시하다. 그의 글 속의 ‘가장 오래된 나무’인 브리스틀 콘 소나무처럼 말이다. 시시해서 겸손하고 풍요롭다.

*

이남호의 글을 읽다 마음이 갈앉으면, 미미하지만 떠들썩하고 퇴기같이 덕지덕지하고 추레한 사직동 사람들 얘기, 조은의 ‘벼랑에서 살다’를 곁들여 읽어보자.

나는 책표지에 실린 양말 사진을 보며 깜짝 놀란다. 그것은 부끄러운 내 시가 만났던 풍경과 비슷하다.


아주 헐한 벽 걸린 것이라곤 둥근 원형 빨래걸이 너실너실한 양말 두 짝이 찝게에 물려 그 마구 발라진 세멘벽에 그림자를 던지네 그 아래 샛길엔 구부러진 외가지 소나무가 버려진 유모차를 향해 고꾸라지고 애기울음소리같은 괭이들 암내나는 소리 양말 두 짝이 더 해실해실해지고 얇아져서 벽에 비친 앵두나무 그늘 그 아래로 건너가네 양말 두 짝이 그 단순한 바람벽에 슬쩍슬쩍 고단한 애옥살이를 띄우네 그 속으로 붉게 팬 길이 흘러가네 콸콸콸 붉은 흙탕물이 솟구치네 바람이 이는 대로 서로 비비고 닳고 해진 풀들이 욱네 빙글빙글 도는 저 빨래걸이에 양말 두 짝이, 그렇게 뽀얀 앵두 그늘이 켕기는지 그 그늘 찝어 담아두려 하네 - 이문숙의 ‘벽’


봄날, 양말들이 걸린 둥근 원형 빨래걸이가 빙글빙글 돈다. 유전하는 삶이다. 가난한 양말들은 애틋하다. 뽀얀 앵두나무 그늘이라도 안간힘을 다해 담아두려 한다. 그러나 사진 속의 양말은 그런 희망조차 없다. 빨래집게에 완강히 물려 있다. 양말은 곧 추운 겨울, 일거리가 떨어져 쭈그리고 담벼락에 쪼르라니 나앉은 사람들의 걱정스런 얼굴들이다.


시인 조은은 터널 끝, 터널의 상징성이 좋아서 터널을 막 벗어난 마을 사직동을 뜨지 못한다. 그녀는 시멘트 반죽을 이겨바른 망가져 가는 한옥에 산다. 남의 얘기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 조은을 끊임없이 불러내고 줄줄이 자신의 얘기를 늘어놓는 것은 이 찌들고 해진 양말의 주인들이다. 그녀를 미스 조라 불러대는 마담의 애인이 쓰던 책상을 주눅들어 사고 그녀는 억울해 한다. 그렇게 허수룩했던 그녀가 마담이 놓아주는 더없이 큰 밥그릇 앞에 앉아 숨소리가 거칠어질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이제 사직동의 삶을 점자처럼 더듬지 않고 자기의 몸에 판화로 새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느날 그녀의 집을 지팡이에 허리를 기댄 어머니가 찾아온다. “내가 죽게 되면 너의 집에 한번도 와보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려서 와보게 되었다.” 이남호가 그랬듯 자식들 생각에 한번도 자신의 고독한 삶을 즐겨볼 수도 없었던 우리의 어머니께 우리는 무얼 돌려 드려야 되나.


조은의 산문에 나오는 김홍희의 사진은 단순하고 아름답다. 너무 아름다워 사직동에 사는 이들의 삶조차 그렇게 여겨지면 어떻게 할까 두려울 정도다. 카메라의 앵글이 따라간 서까래. 그 사이로 드러난 회벽과 거기 꽃술처럼 접목되어 있는 전등. 눈이 덮인 골목길 담벼락에 활짝 핀 조화. 문설주에 걸려 있는 단정한 시계. 한국반공협회기증이라고 써 있는 거울 속에 담겨진 세멘벽에 박힌 가스 배관들.


부지깽이를 거꾸로 꽂아도 산다고 하는 요즈음이다. 사월, 너는 참 좋겠다. 머리맡에 씨앗을 두고 잠들 듯 산문집을 베고 잠들 수 있으니. 이런 때 개자추처럼 개산에서 살 수 있다면. 거기서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다 불타 죽을 수 있다면.


* 개산 개자추: 중국 진나라때다. 문공은 어려웠던 시절 개자추의 도움으로 왕까지 된다. 그리고는 개자추를 잊는다. 개자추는 홀어미와 개산으로 들어간다. 문공은 잘못을 깨닫고 개자추를 부른다. 개자추는 나오지 않는다. 문공은 개산에 불을 지른다. 개자추는 나오지 않고 불타 죽는다. 그것을 기려 ‘찬밥’을 먹는다. 한식이 거기서 비롯되었다.


* 칼 빌헬름 홀소에(Carl Vilhelm Holsoe) 1863-1935

*오래 전 파일에서 우연히 발견한 글을 정리하다 문득, 교보문고 ‘펜’에 발표했었던가.

#이문숙시인#이남호문학평론가#조은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