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 사람

-봄의 육교는 아파요

by 시인 이문숙

봄이 홍매 청매로만 오는 건 아닙니다. 해녀에겐 전복으로 그 전복 따서 적금 붓는 재미로 옵니다. 날이 풀리면서 해토로 일어선 보도블럭 정비하는 경쾌한 망치 소리로도 온다 합니다. 힘든 물질로 단단한 어깨 노동으로 봄이 온다 하네요. 황색 무가지 언론에 지하철 스크린 도어 위 시 속에 주구창창 나오는 꽃타령으로만 오는 건 더욱 아니지요


자주 다니는 길 육교 아래에 기습적으로 이런 ‘설치'로 오기도 합니다. 뱅크시의 세계에서 가장 전망 나쁜 ‘월도프wallled off’ 호텔처럼 조금씩 균열이 오기 시작한 오래된 육교 아래.


누수가 되어 시멘트 종유석이 열린 그 아래. 곰팡이 핀 음습한 공간 아래. 페인트 칠이 부슬부슬 떨어지는 그 아래. 장벽으로 꽉 막힌 불편한 호텔처럼


방독면을 쓴 천사가 날아다니지는 않았지만. 탄환이 뚫어놓은 구멍으로 욕조의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건 아니지만.


비닐 사람과 비닐 산천

비닐 구름과 비닐 자동차

비닐 달과 비닐 태양


육교 아래 색색가지 비닐로 이런 설치를 해놓았습니다. 비닐로 만든 무릉도원도입니다.


세를 못내 폐업한 화통삼겹살 화구와 화구 사이. 고기 타는 연기를 뿜어올리던 연통과 연통 주름막 사이.


비닐 사람은 이곳에서 햇쑥과 봄동을 삽니다. 비닐 구름은 그것들이 시들지 않게 그늘을 배양합니다.


정육점식 황제갈비탕집 거대한 환풍구가 포화의 연기처럼 고기 삶는 냄새를 뿜어 올리지만. 그래도 비닐 사람은 방독면을 쓰지 않고 장을 봅니다.


화통삼겹살집 인테리어를 하나도 바꾸지 않고 깔세로 들어온 농산물식품가게 봄살이 야채와 꼬막이 피망이 화구에 놓입니다. 브로콜리와 무청이 드럼통 테이블에 쌓입니다.


수백 년 썩지도 못할 비닐 사람이 되어. 신호 위반 초음속으로 주행하는 비닐 자동차가 되어. 그 위로 평화로운 비닐 구름이 흐릅니다. 비닐 산천으로 낮밤이 지납니다.


그러나 그 비닐 거리에도 보길도라는 작은 간판을 건 노점의 돌판에서 노릇노릇 김이 구워집니다. 뱅크시의 ‘월도프’호텔 벽화. 침대 위 벽에서 팔레스타인 사람과 이스라엘 경찰이 베개싸움을 하며 폭소를 터뜨리듯 고소한 냄새가 포화 냄새 대신 거리를 채웁니다.


비닐이 비단이 되기까지.

김구이 노점의 김이

검은 비단이 되기까지


( )이/가 ( )이/가 되기까지.

‘불가능의 가능'한 것들에 대해


농수산물야채 가게는 검은 비닐 봉지에 수미감자를 담아줍니다. 김구이 노점은 하늘색 비닐봉지에 부각튀김을 넣어줍니다. 흰 비닐 사람은 조금 슬픕니다.


비닐 안 쓰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얼마 전 누군가로부터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를 실천하는 사람은 욕조에 받은 물을 심지어 마시기까지 해야한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시멘트 종유석이 주렁주렁 달린 육교 아래 협소한 가장 전망 없는 공간에 비닐 사람이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흘러가는 비닐 구름을 멍하니 바라봅니다. 이걸 비닐 일월오봉도라고 불러야할까요.


검은 영원성처럼 비닐 사람의 손에 덜렁거리는 비닐봉지처럼 봄이 오고 있습니다. 장벽으로 꽉 막힌 전망 나쁜 ‘walled off’ 호텔은 뉴욕의 최고급 호텔 ‘월도프Waldorf’를 빗댄 이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호텔입니다. 언젠가 비닐 사람은 그곳에서 베개싸움을 하며 하룻밤 묵고 싶습니다.


#봄#삼월#뱅크시#환경#제로웨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