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15분

-개망개나무 열매는 까맣고 냇물은 희다

by 시인 이문숙

오규원 시인의 유품이다.


벌집 모양 필기구 꽂이. 연필들이 꿀벌처럼 잉잉대며 들락거린다. 톡 쏘이면 살갗이 퉁퉁 붓는다.


나무 사과. 선생님의 손바닥에서 영원히 시들지도 않는다. 과육의 속살이 산화하거나 쪼그라들지 않는다.


아마 배꼽이 오목한 연두빛 사과였으리라. 선생님은 감홍보다 초록에 가깝고 달콤한 과즙이 흐르기보다 시고 텁텁하며 오래 현존할 수 있는 감각을 우리에게 나눠주셨다.


4시 15분에 멈춰 있는 탁상시계. 선생님은 그 시간 둥근 안경 너머로 어떤 오후를 들여다보고 계셨을까. 여기 똑같은 4시 15분이 흘러간다.


“한적한 오후다/불타는 오후다/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나는 나무 속에서 자 본다”


선생님의 마지막 시. 제자의 손바닥에 손톱으로 꾹꾹 눌러 쓰신 이 시 속 ‘더 잃을 것이 없는’ 이런 오후는 어떤 오후일까.


그리고 학생이 끼적거린 어줍잖은 습작시. 그 여백에 뭐라고 가필해 논 선생님의 육필. 그 육필 속에 선생님의 육성이 담겨 있다. 목소리의 잔여물. 영원한 에코랄리아스.


류가헌에서 선생님을 기억하는 시 낭송회를 하고 있다. 선생님이라면 이런 거 하지 말라며 그러실 것 같다. 유명과 허명과 무명을 경계하셨던 선생님. 돌비도 시비도 묘비도 거절하셨던 선생님.


선생님이 가신 2월 2일이다. 아니 1월 33일이다. 아니 1월 33일 4시 15분이다. 개망개나무 열매는 까맣게 익어가고 냇물은 흰 비단을 두르고 눕는 때다.


촛불 밝히고 모인 모임에도 자유발언대가 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하실 것 같다. 왜 자유롭게 시를 안 읽구 이렇게 따분하게 행사를 하니. 나는 이런 거 원하지 않는다. 따끔하게 한 마디 하신다. 그만 멈춰라.


아무나 선생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나가 그분의 시를 읽으면 왜 안될까.


이 모든 예정된 식순들이 가차없이 싫어진다. 갑자기 이 노쇠한 형식들이 지루하고 시들하다.이 모든 상투의 사화집이 끔찍하다.


류가헌에 있었으나 류가헌에 있지 않고 두두물물, 모르는 사람들과 모여 시를 읽는다. 선생님의 안경을 써보고 펜을 훔쳐 4시 15분 선생님의 책상에 앉아본다.


선생님은 참 쌀쌀하셨다.선생님의 쌀쌀한 눈빛을 선생님의 손자국 남은 안경알은 한 번 걸러 내게 보내준다. 어디선가 휙 내려오는 ‘눈부신 채찍’을 보고 시계를 보니, 영락없이 4시 15분이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오후다.’


나는 내 손바닥을 펴 손톱으로 꾹꾹 눌러 적어본다. 개망개나무 열매는 까맣고 냇물은 희다. 3월은 사자처럼 와서 양처럼 간다. 꿀벌이 집단자살한다.


#오규원시인#아름다운현실#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