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세미 만들기
빗방울이 투두둑 가문비 이파리를 뜯어 입가에 붙여줘요.아무래도 푸른 수염이 돋는 것 같아요.
푸른 수염의 남자 아닌 푸른수염의 여자는 빗방울의 ‘살해’ 대신, 빗방울을 따라 가볼 곳이 있어서요. 비가 주룩거리는데, 나비가 마치 환한 날처럼 빠득빠득득 날고 있는 걸 이미 보아서요.
푸른 수염 할머니 정원이어요. 그분은 목청이 크고 까칠해서 말 걸기 어려웠었는데요. 불호령 소리가 담장을 넘구요.
지금은 아쉽게도 폐업한 창의 상점 ‘상상 코끼리’ 주인 어르신이어요. 노란 코끼리가 그려진 간판을 휘감으며 수세미가 주렁거리고요.
상점 난간을 타고 이동 중인 멋진 카라반, 수세미를 구경하는데, 갑자기 나타난 그 무서운 푸른 수염 할머니가 말을 거셨어요.
당신 수세미 도둑 아녀. 그러더니 화분에 심어둔 화초고추를 한 웅금 따시는 거예요. 이게 엄청 맵다시면서요. 그 옆에 선인장도 뚝뚝 꺾구요.
이 수세미는 열 한 갠데, 벌써 다 예약이 차서 이렇게 비 험한 날, 수세미를 보고 또 보는 나에게 하나 줄 수 없어서 너무 미안하다구요.
‘예약’이라는 말이 순간 색다르게 들렸어요. 비행기 예약. 음식점 예약. 이런 예약과는 남다른 예약.
매워 손가락이 화끈대고 가시가 박힌다 하시면서요. 수세미 대신 화초고추와 개발선인장을 따서 처음 보는 푸른 수염의 여자에게 불쑥 내미시는 거예요. 사실은 목장갑을 끼고 선인장을 떼어내야 하는데, 자신의 손은 이미 솥뚜껑 같애 맨손으로 해도 괜찮다면서요.
아무리 가시가 박혀도, 한 사나흘만 견디면 미욱하게나마 통증이 사라지니 괘념하지 말라구요.
수세미는 불볕 사막의 여행자처럼 보였어요. 아니, 낙타처럼 이 염천을 뚫고 뚜벅뚜벅 공중을 걸어거다우물 한 채씩을 파놓은 것 같아요.
푸른 수염 할머니는 살해의 도구나 연장이란 게 없구요. 손이 호미이구 삽이며 갈퀴이구요. 1층 상가가 오랜동안 공실이어도 나비가 비오는 날 빠드득 날듯, 노란 코끼리의 수세미 농사는 계속되구요.
푸른 수염 할머니표 수세미는 이렇게 빠득빠득 제조된다.
1.냄비에 물을 붓고 수세미를 삶는다.
2.껍질을 살살 벗긴다.
3.작은 수저로 씨앗을 떼어낸다.
복잡한 생각의 설거지에는 푸른 수염 할머니표 수세미. 라디오에서 이런 광고가 나온다. 푸른 수염 할머니표 수세미. 주파수 노란 코끼리 라디오 상상 광고다.
수세미는 익으면 내부에는 섬유상 망상조직이 발달한다. 이 망상조직을 씻어내는 또 다른 망상 수세미.
너는 망상이 지나쳐. 그걸 표현할 때 노란 코끼리 아니고 ‘분홍 코끼리pink elephant’라 한다는데. 수세미 만드는 방법은 ‘망상 세척하는 법’ 같아.
1. 냄비에 물을 붓고 망상을 삶는다.
2.망상의 껍질을 살살 벗긴다.
3. 작은 수저로 망상의 씨앗을 떼어낸다.
선인장 가시에 찔리면 안 되고, 화초고추에 손바닥이 화끈대면 안 되니까. 여기 구두 상자에 담아주시는 거라고. 수세미는 내년을 예약하라고.
재활용 쓰레기 봉투 옆에 버려진 구두 상자에 담아주시는 그것들을 안고 푸른 수염의 여자는 한참을 걷는다.
(이탈리아 북부 볼로냐 근방 소도시 카스테나소Castenaso 미용실에서는 세 번 샴푸질하던 머리를 한 번만 감기는 일시적 법률이 발동 중이다. 위반하면 과태료를 문다.)
그렇게 예약은 되었습니다. 푸른 수염에 빗방울이 살해나 훼손이라는 말 대신 조롱조롱했구요.
(영국은 물 발자국water footprint을 줄이기 위해 정원에서 호스 사용 금지와 욕조 목욕 대신 간단한 샤워를 하라고 캠페인한다 그런다.)
푸른 수염의 여자는 걷다가 화초고추 하나를 빗방울에 씻어 한 입 문다. 입술뿐 아니라 푸른 수염까지 홧홧하다.
그렇게 ‘예약’이란 새로운 말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의미를 갖고 노란 코끼리 코 난간에 걸터앉아 왔어요.
왔습니다.
쐐하는 빗소리 속으로
또옥 똑
ㅇ
ㅖ
ㅇ ㅑ
ㄱ
조요히 분절되는 음들.
#김영기, 향가일취, 1946, 종이에 수묵담채, 170*90, 김영기 기증 현.국립현대미술관소장
#가뭄 #폭염 #기후행동 #물절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