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뮈엘 베케트의 '프루스트'
(꼬박과 해이)
'요사이 해이해진 거 아냐'. '해이'의 집주인이 이렇게 말하며 문을 쾅 닫고 들어간다. '해이'의 구두 또각또각 복도식 난간에 부딪치는 소리, 엘리베이터 땡하는 소리. '해이'가 건물 그림자 사이로 멀어지는 소리.
그런데 그 소리 좋다. '해이'의 세입자는 그 소리가 점점 멀어지며 작아지는 게 좋다. '해이'가 낯설고 새롭게 정의된 언어로 들린다. 귀 속에 새로운 공기를 넣어준다. 불꽃이 마지막 혼신을 다해 물에서 피식 꺼지듯.
'해이'라는 말, 참 오랜만에 들어본다. '해이'의 반점 가득한 과일은 무의식의 바구니에서 껍질이 헤벌어지고 날벌레가 꼬인다. '해이'의 가재도구에는 물때가 끼어 미끄덩하다. '해이'의 갑작스런 재난.
사뮈엘 베케트는 '프루스트'에서 제우스 아들 '탄탈로스'가 연못에서 목을 내놓고 있는 모습에서 우리의 처지를 본다. 시간과 날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감질나는, 약오르는 탄탈로스. Tantalize라는 말. 그가 물을 마시려고 할 때 목까지 잠겨있던 연못의 물은 물러난다. 과일나무에 손을 내밀 때, 가지를 바람이 밀어낸다.
물러남과 밀어냄, 간절히 원할 때 가질 수 없음. 우리의 처지가 이와 같은 '약오름'이라면, 우리는 설령 어떡해야 하나.
이 '감질남과 약오름'로부터, 그 연못의 물결로부터 기어이 '해이'해지고 싶다. 그로부터 '해리'되어 다시 신들의 식탁에 '해이'의 불완전한 요리를 차리고 싶다. 언제나 똑같은 맛의 오믈렛이 아닌, '해이'하고 텁텁하고 딱딱한 오믈렛.
우리가 탄탈로스의 연못에 갇혀 있을 때, 파문으로 번지는 애잔하고 비리비리한 '해이'라는 소리. 끌려가지 않으려고 뒷다리를 뻗딩기는 비루먹은 갈기를 가진 말 발굽이 모래밭에 쓰는 힘센 '나태'의 소리. 앙알거리지 않고 질질 끄는 '안일'의 소리.
신비로운 말의 욕조에 퍼붓는 수압 센 언어의 저층에서 파급되는 가압펌프장의 '쉬익쉭' 소리. 거품을 찍어 하얀 타일에 '해이'라고 쓰면 그 거품조차 타일에 은폐되고 보존되는 소리.
사뮈엘 베케트는 습관의 연속인 이 삶에서 불멸의 요리사 '프랑스와즈'를 불러낸다. 부엌에서 '꼬박' 임무의 본질을 해내는 요리사. 오믈렛이든 뭐든 완벽하게 해내는 이 요리사의 부엌은 '낯선 하늘이나 낯선 방의 신비를 풀기는 역부족'이다.
그래, 우리의 역부족을 실감하고 역부족을 포옹하고 용인하자. 가끔은 완벽하지 않고 태우기도 한 '오믈렛'을 식탁에 내자.
이때 '꼬박'이라는 말과 쾅 부딪치는 말 '해이'. '꼬박' 부엌에서 팬을 달구고 뒤지개로 삶을 완벽히 '오믈렛'해야 한다면, 이러한 삶의 '습관은 끊임없이 갱신되어야 하고 만료되지 않도록 유효화시켜야 한다.'고 베케트는 쓴다. 매일매일, 이 감질맛 나는 습관으로부터 해이함. 매일매일의 창조.
'꼬박' 이라는 말과 부딪치자, 금방 '해이'는 갸날퍼지고 거렁뱅이의 '풋사과' 같은 말이 된다.
'해이'의 집주인이 나가자, 해이,해리,안일,안이,안온. '해이'와 공중 그네를 탄다. 서서 발을 서로 엇갈려 놓고 구른다.
반복, 습관, 나태, 기억, 조련, 숙련이 관찰자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해이'의 공중곡예는 습관보다 아슬하고 감질이 난다. 해이의 그네는 미세하게 떨리고 미세하게 멀어진다.
'해이'의 곡예를 지켜보는 위험 대비형 그물과 그 아래 매트.
어쩌면 갯뻘이 발목을 붙들 때 살아남는 방법. 발이 푹푹 빠져들어가도 버둥거리지 말고 뒤로 눕기. 뒤로 나자빠져 가뿐히 있기. 발을 끌어들이는 무소불위의 힘을 흩어놓으며 천천히 발을 빼기. 그 구멍을 관찰하고 감각화하고 그 '무의식'의 흡인력으로부터 '해이'해지기.
'해이하게 생각하지마.', '해이하지 않니.' 그런들 나는 '꼬박'과 가끔 이별하고 해이와 '상리과원'에도 가고 '밀리'라는 곳도 가고 '말리서사'에도 가고프다. 그곳에서 '해이'의 매혹적인 사서와 연애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