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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 이문숙 Dec 13. 2022

‘ㅁ’이라는 수조

-감성돔을 주세요

시집 ‘하동’을 읽는다. 숨 한번 폭 쉬고 읽는다. 읽다가 맨 앞장 백지로 돌아간다. 목차보다 늘 앞서는 백지. 그 하얀 공백. 그 쑹쑹한 바늘 구멍. 시인의 싸인을 본다. 작고 귀여운 필체로 이름과 날짜를 적어놓으셨다.


아직도 중학생 모자를 쓰고 계시듯 한 자 한 자 적어놓으신 작고 오브장한 필체 중에 ‘ㅁ’자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다른 글자는 예서나 해서 같았는데, ‘ㅁ’자만 각별했다.


멋부리지 않은 ‘ㅁ'자가 닫혀있지 않고 살짝 열려 있다. 아니, 'ㅁ'자의 왼쪽 위쪽 귀퉁이를 일부러 열어 놓으신 거 같았다. ‘ㅁ’을 보면 속이 머슥해, 숨막혀. 별들의 지옥 같애. 마치 횟집 수족관의 ‘ㅁ’처럼. 그러시는 듯.


지나가다 횟집 수족관을 본다. ‘ㅁ'의 수조.  이 ‘ㅁ’은 대체 뭐에 쓸 것이오. 저 납작 엎드려 송장헤엄하고 있는 저건 뭐시오. 이 좁은 수족관 바닥이 갯바위인 줄 착각하고 위장색 드리우고 있는 저건 또 뭐시오. 비단조가비와 돌가자미와 우럭. 곧 우화할 것 같은 줄무늬 감성돔까지. 탈출하시오. 유수지나 하천, 바다로 가시오. 그러시는 듯.


사실, 수족관 ‘ㅁ’은 폭풍이 들어있는 찻잔 속처럼 고요하기만 하다. 산소공급기가 뽀글뽀글 기포를 만들며 쉬식거릴 뿐. 심지어 어떤 수족관에는 플라스틱 갈조류가 남실대고 심해의 어둠 속을 모방해 검은 해파리같은 흐느적대는 직물을 걸쳐두기도 했다.


시 ‘수달의 고난'을 다시 읽어본다. 횟집의 수족관은 영락없이 글자 ‘ㅁ’자를 닮았다. 그 ‘ㅁ’ 속에는 보리새우, 우럭, 감성돔이 산다.


수달이 횟집 창을 넘어와 처음에는 바닷장어 같은 것을 물고 가기에 애교로 봐주었더니

-이시영 ‘수달의 고난’


아침에 가게 문을 열던 횟집 주인은 수족관 ‘ㅁ’에서 처음엔 바닷장어가 보리새우가 차츰차츰 우럭이 사라지는 걸 발견한다. 기여코 어류 중에 값비싼 ‘감성돔'이 사라진 날, 횟집 주인은 cctv를 열어본다.


보리새우, 우럭에다 값비싼 감성돔까지 물고 가니 덫을 놓을 수도 없고

-이시영 ‘수달의 고난’


범인은 수달. 폐수와 쓰레기, 하천 바닥 깎이로 먹을 게 사라진  낙동강. 강의 유수 아닌 유수. 고체가 된 강에서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횟집 수족관을 침략한 수달. 작은발톱수달.


천연기념물 330호 수달. 멸종위기 1호 수달. 수달은 수족관 ‘ㅁ’을 탈취하는 레지스탕스 같다. 그 수달은 수족관 유리를 열고 새끼에게 젖먹이 어미에게 줄 먹을 걸 찾아나선 아비 수달일까.


시인은 수달이 되어 수족관 ‘ㅁ’의 귀퉁이를 일부러 열어둔다. 컴컴한 심해의 산호가 달빛을 배고 붉은 산호를 낳는다는 말을 들어보셨는가. ‘ㅁ’에서 탈출하시오. 물의 섬멸. 물의 멸종위기로부터 서둘러.


굶주린 수달을 위해 수족관 ‘ㅁ’을 시인이 일부러 살짝 열어놓은 것 같다. 귀퉁이가 열린 글자 ‘ㅁ'이 수달이 첨벙거리다 달아나느라 열어둔 수조 같았다.


더구나 그 속에 갇혀있던 게 줄돔, 옥돔, 돌돔, 금눈돔, 뿔돔 같은 돔이 아니고 ‘감성돔’이라니. 시인이 선택한 언어가 예사롭지 않았다. 감성돔의 ‘감성'이라는 말이 어미 수달의 쪼그라진 젖가슴 같았다. 감성이 사라진 시대를 향한 작고 귀여운 시인의 질책 같았다. 갑자기 잃었던 감성의 입구가 ‘돔dome처럼 휘둥그래졌다. 감성돔을 탈취한 수달. 감성을 회복한 사람들. 식물들. 사물들. 현상들. 인터넷 트롤들을 움츠리게 하는 말의 횃불들.


멸종위기 야생포유류로는 수달과 너구리와 족제비, 두더지가 있다 한다. 심지어 도시 하천에는 작은발톱수달이 산다 한다. 그러다 하천이 범람하면 수달의 둥지가 유실되어 수달의 방랑이 시작된다 한다.


내가 사는 곳 문촌 어린이공원 현수막에도 하수구에 너구리가 산다는 알림문구가 있다. 하수구에 둥지를 튼 너구리. 너구리가 출현해도 놀라지 마세요. 지나가다 도로 밑 하수구 뒤엉킨 미로를 혼자 돌아다니는 너구리의 고독을 상상한다.


손해배상 청구할 데라도 있으면 가르쳐달라고 횟집 주인은 TV 카메라 앞에서 연신 울상을 짓는 것이었다.

-이시영 ‘수달의 고난’


시인의 ‘ㅁ’ 이후, 횟집 수족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통영횟집, 오마카세 스시집, 애월바당, 오징어우미 앞 대형 수족관 위에 뜰채가 얹혀져 있다. ‘ㅁ'의 수조. 수족관에는 무수한 'ㅁ'들이 헤실헤실 송장헤엄하거나, 바닥에 위장색의 돌가자미가 죽은 척 벌렁거리며 누워 있다. 살았니 죽었니, 수중생물들아. 나는 톡톡 수족관 ‘ㅁ’의 유리를 두드려본다.


어린이공원 아래 하수구는 갈대, 부들, 총상꽃차례 낙지다리, 긴흑삼릉, 질경이택사가 살던 옛날의 실개천이 흘렀던 장소였을까. 너구리는 그곳에 은신하여 무엇을 먹을까. 은모래가 흘러나올 것 같은 하수구를 상상하며, 야간에 출몰하는 너구리를 위해 발소리를 낮추며 걸어본다.


걸어가다 그릇 모양 습지에 잎을 띄우고 있는 가시연을 본다. 흰솜털 뽀송한 노랑어리연, 물 위에 둥둥 떠있는 낙하산 같은 개구리밥, 생이가래, 물속에 사는 이삭물수세미. 이것들의 호출처럼 정하고 맑은 물이 들어오는 다문다문한 소리를 들어본다.


동구청 앞 횡단보도를 건너다 우연히 방랑하는 수달을 만난다. 호수공원으로 같이 산책간다. 수달과 함께 벤치에 앉아 바다처럼 넘실대는 물의 잉걸불을 본다.


수달은 자신에 대해 전혀 모른 듯 갸웃헸다. 수족관 ‘ㅁ’에 대해서는 까마득 잊은 것 같았다. 수달은 벤치에 앉아 흰 비행선을 본다. 저 떠가는 비행기에 탑승해 어디론가 훌쩍 달아나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비행기가 사라진 곳에 바늘 구멍 같은 것이 쏙 뚫린다. 작은발톱으로 수조 ‘ㅁ’을 할퀴고 어느덧 ‘감상돔’을 물고  달아난 수달을 껴안고 전복하는 물. 물의 반란. 물의 거대한 착란이 꾸르럭댄다.


비행기가 사라진 그 조그만 바늘구멍을 보면 조용하고 구획 잘된 호수가 뒤집힐 정도로 재미난 일이 곧 생길 것 같다. 수달이여,  잔혹하도록 고요하기만 이 ‘ㅁ’의 수족관을 뒤흔들어 줘요. 운명이란 이런 건가 봐요. 출렁이는 호수가 당신을 이끌고 있어요.


*william Blake, pity

#이시영시인#하동#수달#감성#공감없는악성댓글타파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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