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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 이문숙 Dec 30. 2022

으으음, '최외고.'

-오늘도 출석하셨나요

참 고마운 연하장이 혁준에게 왔다. 나는 흰옷만 입는 에밀리 디킨슨을 가장해 혁준을 한글도 제대로 못뗀 아이의 색다른 문법을 가진 시인이나 급식 음식을 으깨거나 빨간 고추장 소스, 간장 국물로 그림을 그리는 피카소 바스키아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내 주소를 알아냈는지 가끔 편지를 보내온다. 선생님, 저 제과제빵사 자격증 땄어요. 저 성적이 올랐어요. 저 2010년 성산중 1학년 3반 출석부 다 외워요.


혁준의 이런 희귀한 능력을 어디에다 쓰면 좋을지. 혁준은 장애인 카드를 받았다구 또 편지를 보냈다. 오래 전 가르쳤던 아이는 불쑥불쑥 내가 까마득 잊었던 걸 던져주곤 한다. 퍼들퍼들한 살코기같은 시뻘건 덩어리를, 휘익.


이곳에 기습추위를 상쇄하느라 알랭 들롱의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 Purple Noon, 1960' 보았다. 그의 보랏빛 눈과 빙충맞은 걸음걸이. 마지막 장면의 주인공 남자 톰의 대사는 '최고meilleur’였다. 아름답고 돌진하는 비천한 자의  파국이   모르는 으으음, '최외고.'


혁준의 편지는 ‘최외고’다. 톰의 마지막 대사처럼. 연하장도 크리스마스 카드도 멸종위기사물이 되어가는 이 즈음 나는 소리내어 그때의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번호에 맞춰 불러보았다. 편지는 아주 길다. 한 줄에 한 명씩 써넣어서 아주 두툼해진, 이 여백이 더 많은 편지.


서울 성산 중학교 1학년 3반 반 번호 친구들 이름

1번 강진호

2번 고원욱

3번 권재혁

4번 김동현

5번 김명진

6번 김민수

7번 김민식

8번 김민혁

9번 김범수

10번 라수현

11번 박호동

12번 백민주

13번 백준영

14번 서봉균

15번 서윤성

16번 송경철

17번 신명훈

18번 안혁준

19번 양석준

20번 염호식

21번 옥동연

22번 유재원

23번 윤종찬

24번 윤지훈

25번 이광희

26번 이선우

27번 이승민

28번 이재성

29번 장덕훈

30번 정조은

31번 조성건

32번 조영남

33번 주일류

34번 최민영

35번 이정훈

36번 장경은


선생님, 나는 서울 성산중학교 1학년 3반 반 번호와 친구들 이름은 엣날에 학교 다닐때 부터 다 외워고  지금가지도 기억하고 이씁니다. 담임샘 이름은 이문숙임니다.


그래 혁준아, 고맙다. 너 아니면 기억 속에서 하얗게 말소 중인던 이 고귀한 이름들과 그 품위들을 다 잊어버리고 말았겠지. 선생님을 매일매일 괴롭히던 이 작고 끔찍하고 귀엽고 뚱뚱하고 떼쟁이였던 요괴들. 그래두 담임샘을 존중해 주려고 내가 울면 같이 검은 눈물 그림을 그리며 꿀쩍대던 너희들. 정훈아 명진아 선우야. 윤성아, 민혁아, 민주야. 이 담탱이를 담쟁이만큼이나 아껴주던 너희들.


그때 학교에서 잠깐 걸어 가본 절두산에서 보면 한강 물이 우리 눈물로 조금은 수위가 높아져 밤섬 주변 미나리꽝 같은 걸 만들어 놓기도 했단다. 새파란 미나리가 우리 눈물 속에서 동공에서 투명한 수정체에서 쑥쑥 올라오기도 했단다.


나도 그 합정역 7번 출구가 지금도 눈에 눈조리개 주름막처럼 펼쳐져. 아침 출근길 김밥 파는 행상들. 스티로폼 박스에 가득 담겨있던 은박지에 돌돌 말린 1000원 짜리 김밥들. 손에 쥐면 따끈했던 그 김밥들. 사지 않고 보는 것만으로도 아휴, 또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하얀 눈물의 조례, 종례들.


오늘 알랭 들롱의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 Purple Noon’을 보며 압생트 같은 독주를 마시는 기분이 든다. 보랏빛 정오에 보트 스크루에 끌려나온 잘 유기했다고 생각했지만, 결코 그렇게 안되었던 추억들.


이곳은 구질구질한 이부자리 속이 아니라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낮섬, 보랏빛 정오, 태양이 끄득한 해변. 추억의 선베드에서 천천히 ‘헤어질 결심’으로 몸을 일으켜 보며 질러보는 탄성. 으으음, 최고milleur. 아름답고 돌진하는 비천한 자의 곧 파국이 올 줄 모르는 으으음, '최외고.'


그렇다. 낮섬이란 나의 마지막 학교 주변 합정동 어디엔가 있다 한다. 이 카페에선 시집과 어울리는 (커피나 음료가 아닌) 낮술을 매칭해 판다 한다. 나는 아름다운 주정뱅이는 되지 못하지만, 낮술 한 켤레는 좋아하는 양말처럼 한 잔 신어보고 싶다. 으으음, 최고milleur. 아름답고 돌진하는 비천한 자의 곧 파국이 올 줄 모르는 으으음, '최외고.' 라고 외치며.


이 카페 주인의 뜻에 의하면, 나의 세번째 졸시집 ‘무릎이 무르팍이 되기까지’는 스코트랜드 핫토디란 독주와 잘 어울린다 한다. 핫토디는 어떤 술일까? 어떤 독주일까?


초록 피로 만든 것 같은 압생트처럼 내 의식을 순간 꺼트려 재로 만들 수 있을까. 밤의 여왕, 내 친구 귀여운 주정꾼 인옥아. 대답 좀 해봐. 핫토디가 얼마나 독하길래 무릎이 무르팍이 되어 쓰러질 때까지 마셔야 하는 건지.


오늘 일력 속에 영원하고도 하루를 남긴 이곳은 꼭 낮섬 같다. 여기는 장미문양 밍크담요가 덮고 있는 보랏빛 정오라서 태양이 끄뜩하다. 어떻게도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이 작고 듬직하고 흠집 많은 시간의 테이블에 작은 제의 같은 밀초를 켜본다.


그 위에 헌상한 눈꼽재기 잔 속 핫토디 대신 아니 맑은 간장, 아니 맑은 물 한 켤레라도 담아 마시면, 저 창 밖 쌓인 눈으로도 아카시꽃관을 만들어 쓸 수 있는 거니. 저혼자 말끄러미 대관식하려다 미끄러진 미친 오필리아처럼 빛의 폭포수 속에 익사할 수 있겠니.


물에 수장되어서도 둥둥둥둥 이과수 먼 폭포로 떠내려갈 수 있겠니. 낙폭을 헤아리지 못하는 그곳에서 마구 부서지는 물방울의 왕관을 쓰고 한때는 나의 신민이었던 나의 아이들을 다시 호명하고 섬길 수 있겠니. 혁준아, 민혁아, 민주야. 다들 무얼하며 살고 있니. 세월호와 이태원을 겪은 너희들 마음이 살풋하다. 낮섬처럼 애물스럽고 보랏빛 정오처럼 빙충맞고 부족하다.


어쨌든 시에 술 타령, 꽃 지화자 나오면 읽지 않던 나.  술술이 이런 편견과 맹목은 애초부터 개나 물어가라지. 오늘 영하의 강추위가 장미넝쿨 밍크 담요처럼 덮고 있는 낮섬엔 보랏빛 정오가 가득하다. 오늘은 낮술 한 잔, 한 켤레 걸쳐야겠다.


내가 조심스레 품고 있는 편견이란 동물은 나를 망둥개처럼 겅중겅중 뛰게 하지. 어서 볕늬 가득한 남쪽으로 튀어. 거기 아물아물 황새냉이만한 낮섬이 있다면. 그 작은 씨앗 모양은 하트 심장 모양. 심장에 심방심실. 거기 은둔형외톨이로 앉아 눈꼽재기 잔에 핫토디 한 모금.


카페 ‘낮섬’의 발상은 어느 북 카페의 밤샘 미독만큼이나 미혹적이다. 언젠가 알콜 한 방울두 마시지 않은 나를 끌고 가자, 낮섬이다. 보랏빛 정오다. 술 염오자도 마실 수 있는 술을 줘라. 그동안 유칼립투스 백 그루나 낮섬에 심어두고 있어라. 브라운헤이븐의 갈색 그늘을! 그 안식의 그늘 아래 ‘최외고’를

*눈오리출석부, photo by 이문숙

* 딴짓러들의 오아시스, 낮섬 https://naver.me/FcacOldI


#알랭 들롱#태양은 가득히#카페낮섬#무릎이무르팍이되기까지#이문숙시인#문학동네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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