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숙#아르코문학창작기금선정작
리치몬드 과자점에 사슴 쿠키를 사러갔어. 벽에 걸린 아연합금 사슴 머리가 내려다봤어. 아무리 조심해도 포장지 속 *쿠키는 부서지기 마련. 나는 아연합금 사슴 머리를 쓰고 마트에도 가고 동사무소에도 갔어. 사슴의 말을 쓰고 사슴처럼 걸었어.
그러다가 진짜 사슴을 보려고 리치몬드 파크에 가기로 했어. 호수라고 생각해서 접근하면 연못이라고 안내하는 이상한 표지판들이 나를 하루 종일 빙빙 돌게 했어. 사슴 가까이 가지 마세요. 공격합니다.
그러다 남반구에서 사슴을 보러왔다는 여자를 만났어. 그녀가 내게 다가와 물었어. 당신은 사슴을 보았나요. 진짜 사슴은 개처럼 컹컹 짖어대고 괴성을 지르고 서로 싸우다 날카로운 뿔이 뒤엉켜 같이 죽기도 한다는데. 사실 세 마리를 보았지만 결코 못 보았다고 했어.
그러나 나도 사슴을 제대로 보기는 한 걸까. 한 번은 물닭이 홰치며 수면을 흔드는 바람에, 우연히 저쪽 건너편 발정한 몸을 식히려고 물속에 있는 사슴 머리를 잠깐. 또 한 번은 덤불 아래 엎드린 그것의 미진한 꼬리를 슬쩍 한 번. 한 번은 고사목 그림자 속에 있다 내 눈과 딱 마주친 그냥 뻥 뚫린 구멍의 눈 한 번.
리치몬드 파크에는 왜 갔니. 가도 가도 끝 모르는 광활한. 투기꾼도 채굴자도 불법 사냥꾼도, 무화과 상자도 없는 그곳에서 내가 본 건 고작 사슴의 머리. 눈. 꼬리. 쿠키는 부서지기 마련이야. 결코 온전한 사슴을 본 적 없고.
고장 난 악기처럼 끼이끽 울거나 푸른 늑대가 임신시킨 흰사슴이 사람의 아이를 낳거나. 새끼들을 줄줄이 거느리고 이동하는 사슴을 만난 적은 아예 없고.
*후박나무, photo by 이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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