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숙#아르코문학창작기금선정작
왜 그 먼 리치몬드 파크까지 가서 사슴 한 마리 보지 못했니. 오늘은 그 대신 리치몬드 과자점에나 가서 사슴 쿠키를 사고. 아연합금 사슴 머리를 쓰고. 오늘은 이곳저곳으로 부서진 이산가족들이 궁금하고. 적란운이 쌓인 허공 속 박혀있는 솜틀집이 어디 있나 찾아보고.
넓고 넓었지만 호수가 아니고 연못이라 부르는 그 기이한 곳에서 갑자기 첨벙거리며 물을 건너는 사슴들.
사슴은 결코 제대로 된 모습을 내주지 않고. 나는 아연합금 사슴 머리를 쓰고 눈에선 비문증이 돌고. 시야의 모든 것이 부서져 빙빙 돌고. 아연합금 사슴 머리를 쓰면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해 나는 사슴의 말을 하고 사슴처럼 걷고.
꽃이 없는 게 결코 아닌 무화과는 과육이 꽃이고 구름은 부서진 쿠키의 방식. 그 쿠키의 부서지며 번민하는 방식. 올여름이 다 가기 전 눅눅해진 솜을 틀고 싶은데, 솜틀집은 리치몬드 파크에 없고.
쇠약해져 쓸모 없어진 사슴은 끝내 처형되고. 새끼를 낳던 몸은 육포가 되거나 파이가 된다는데. 저 쿠키처럼 부서진 구름을 박제하면 다시 무엇이 되나. 눈에선 비문증이 빙빙 돌고 포장지에는 온전한 쿠키 하나 없고.
*That's the way the cookie crumbles
*오래된미래, photo by 이문숙
#아르코창작기금#시#삶의균열#현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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