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숙#아르코문학창작기금선정작
( 깻잎의 춤을 가능한 느리게 보여준다. 열쇠 절겅대는 소리 맑게 배경음으로 흐른다.)
ㅅ ㅅ ㅅ ㅅ의 천창 아래 폴란드 신부 배관공 이냐시오가 막힌 싱크대를 뚫어주러 로사의 방에 온다. 로사는 쩔쩔맨다. désolé, désolé. 여기서 깻잎은 기르는 게 금지되어 있다.
신부가 뭐라고 지껄인다. 이 미친 여편네야, 저 화분 당장 내다버려. 알아듣진 못하지만, 아마 그런 말일 것 같다.
(리타는 그 깻잎 너머 맞은편 길목의 한 상점을 본다. florilège de soin. 무슨 뜻일까. )
로사는 가끔 리타와 앤지가 있다는 걸 까먹고, 바깥에서 열쇠로 문을 잠그고 학교에 간다. 밖에서 잠그면 안에서 열리지 않는 문. 막힌 '우주'를 향한 천창의 새파란 치통.
(앤지가 뾰로퉁해진다. 하늘거리는 깻잎의 천창.)
돌아온 로사가 갑자기 소리지른다. 앤지와 리타에게 지금 당장 나가. 너희들 때문에 시험 망칠 것 같아. 그러더니 며칠째 돌아오지 않는다.
(공중에서 열쇠 절겅대는 소리. 문턱seuil은 한계라는 뜻도 갖고 있다.)
리타와 앤지는 바깥 출입을 못한다. 열쇠 구멍에 눈을 대보지만, 그뿐이다. 더러운 커튼 너머 발꿈치가 지상에 닿지 않는 파란 깻잎의 춤. 정말 로사가 이럴 줄 몰랐어. 아아 지독한 깻잎 냄새.
하루가 간다. 이틀이 지나간다. 물이 없다. 먹을 게 떨어진다. 깻잎 너머 바깥에서 음식 쓰레기통을 뒤지는 아이가 보인다. 먹을 게 없없없없. 리타와 앤지의 창백한 천창. 그때 열쇠 구멍에 열쇠 넣는 소리가 들린다.
(딸깍) 문이 열린다. 무성해진 깻잎에 맺힌 'ㅅ'의 횃불을 보던 리타가 놀란다. 누구지. 로사는 아니다. 로사의 열쇠를 절겅대며 ‘모르는 그녀'가 오히려 더 놀란다. 누구세요. 왜 남의 집에 있어요.
(앤지는 화가 나서 곧 나갈 거라고. 나가요나가요.나가.)
리타가 '모르는 그녀'에게 묻는다. 열쇠만큼은 절대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는 로사가 당신에게 정말 열쇠를 맡겼다구요. 정말 믿어지지 않아. 로사는 다른 사람 같아. 알고 있던 사람이 아냐.
앵발리드역 전철이 으릉 지나갈 때마다, 리타는 그 객실에 승차한 상이군인의 마음 같아.
('모르는 그녀'가 리타를 놀리듯 상이군인처럼 절뚝댄다. 한팔을 몸에 숨기고 빈 소매자락을 펄럭인다. 당장 이곳에서 꺼져.)
*진열장유리너머, photo by 이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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