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는 나쁘지 않아

-여자노인짐승

by 시인 이문숙

왜 이대도록 시간이 안 갈까. 눈 뜨면 두렵다. 세실은 옆 고등학교 급식도우미로 간다. 젬마는 초등학교 돌봄보조교사로 간다. 아네스는 옆단지 어린이집 주방 찬모로 간다. 모두 일을 한다.


나는 느린학습 치료자로 일할 뻔했다. 코가 어디야. 아이는 망설이다 귀를 잡는다. 말은 어떻게 달려. 어슬렁어슬렁. 칙칙폭폭. 구물구물. 따각따각. 아이는 구물구물한다.


너무 힘들 것 같았다. 그냥 생각이나 준비없이 몸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꽃배달부카드배송원공원미화작업반. 매일 가는 건 또 싫다. 파리바게트 파트타이머. 지원했으나 내 나인 안 된단다. 깔끔한에이프런위생모자비닐장갑. 난 누구보다 위생적으로 일할 수 있다. 배타적인 사회는 여자노년짐승에 더 국한되는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쌩쌩하고 머리도 나쁘지 않다. 나이는 나를 ‘나쁜 존재’로 만든다. 심지어 도덕적으로 해악이 된다.


얼마전 주교좌 성당 사무실에 고인이 된 C의 세례명을 알아보러 갔다. 결혼식도 성당에서 하려고 배우자 되는 분도 혼례 전 예비교리를 받았다 한다. 갑작스런 발병으로 떠나버린 아내의 세례명을 찾게 되면 촛불이라도 켜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에 안된다 한다. 배우자가 오면 돼요. 배우자는 상심이 커서 바깥에 안 나오세요. 여기까지 올 마음을 못 내셔요. 그래서 제가. 저 주민증 여기 있으니.


갑자기 신부님이 나타난다. 안됩니다. 업무방해하지 말고 나가세요. 업무방해방해. 나가십시오. 떼쓰지 말고.


저는 그저 돌아가신 분. 촛불 하나. 정 법 때문에 안된다면 신부님. 예외조항을 다음 회의에서 건의라도 해주세요. 종교는 법을 초월하는 거 아닌가요. 그저 촛불 하나. 배우자의 슬픔이 그것으로 해소된다면.


나는 업무방해로 쫓겨났다. 떼를 쓰는 나쁜 사람이 됐다. 무례한 신자로 취급됐다. 나는 얼마전 읽은 시집 제목 ‘바다빗소리작약’으로 취급되고 싶은데.


노역자석 아니 노약자석에 앉아 조는 자들. 임산부석에 시장 카트를 끌고 턱 앉아있는 여자들. 심지어 중절모의 남자들. 당신 임신하셨어요. 보다못해 서있던 동년배 남자가 농담을 건넨다. 웬 참견이슈. 그런 눈빛으로 본다.


어염집 비단방석인 듯 분홍이다. 왜 분홍일까. 분홍해변바다물결호수. 왜 빨강이면 안 되는 걸까. 노안으로 보면 빨강이 보라 같다 한다. 그래서 보라모자보라스웨터보라코트를 노인들은 좋아한다.


보고싶은 엄마에게 빨강 옷을 사드리고 싶다. 인공호흡기 낀 엄마는 환자복 대신 입혀드린 빨강 옷을 보라가 곱다 하며 손바닥에 보라하고 적을 것이다. 아버지에겐. 빨간 넥타이를. 총상 입은 왼팔로 셔츠깃 아래 보라하며 매볼 것이다.


그래서일까. 딸이 안 입는 보라원피스를 입어보았다. 그 아래 다른 치마를 받쳐 입어야 할만큼 짧았다. 이런다고 내가 젊어지는 건 아니다. 업무방해로 쫓겨나지 않는 건 아니다.


단지 상심 큰 배우자가, 친구인 내가 보라 촛불 하나 켜려고. 근무하던 학교 운동장 스탠드 철골조를 휘어감고 올라가던 등나무꽃 같은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보라 하나 켜려고 한 건데.


지하철에서 본 노인의 보라염색흰머리에서도 보라 촛불을 본 나. 돌아가신 분의 정보를 도용할 것도 아닌데.


모든 보라는 나쁘지 않은데. 차별이 없는데. 나는 떼쟁이업무방해죄인여자노인짐승.


휘양숭휘양숭 루이햐 붱붱 정말

-안태운 ‘의태어 만들며


*가브리엘 뮌터, still life on the tram


#종교는법을초월하는거아닌가 #가브리엘뮌터 #촛불켜고싶어서 #권위주의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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