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사라는 게 있어

-스노우드롭했다

by 시인 이문숙

여기 올 때마다 가멸차게 온다. 가멸은 무슨 말이야. 부유라는 뜻이야. 근데 ‘멸’자가 들어서 그런지 빈한하고 소심한 멸치처럼 느껴지는 건 왜야.


비 급작히 오니 이 세상에서 가장 긴 팔 내려온다. 현악기 연주를 잘하려면 활이 내 팔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힘 쑥 빼고 활이 환상수족이라고 여겨요. 다뤄야 할 도구가 아니구요. 아니라구요.


비 오기 비 오기 전 비 오기 전. 팔이 늘어나려 한다. 이렇게 길어지는 긴 팔로 두 손 모으고 앉을 수 있을까. 장미꽃잎 속 물고기 형상. 그 형상 올려보며 거기 드는 빛. 눈 시려 볼 수 있을까.


백지사라는 게 있어. 젖은 백지를 코입 위 붙이고 붙여. 마를라치면 물을 뿌려. 호흡이 멈출 때까지.


비가 오니까 비가 긴 팔로 점점 늘어나니까 들어가봐. 기도는 무슨 기도야. 가끔 쉬기도 해야지 우산두 없으면서. 잘난 척은. 잠시 비 그을 때야. 비 오니까 한 번 들어가봐. 젊은이들 따라. 화火선생 불짬뽕 이집 어때. 직장인들 사이 앉아봐. 직접 뽑는 생면. 꽃게는 카리브해 도미니카. 오징어는 그리스. 다국적인 이 맛 궁금해.


도메인 주소가 ‘ .ai’라서 AI와 같아서 그 주소 사려고 돈벼락 맞았다는 섬. 그 섬에서 온 것들일까. 직장인들 대화는 온통 AI적이야.


잘못 들어온 것 같아. 나 낄 자리 아니네. 나가자 종업원 모르게. 스며들듯 나가자. 백지처럼 나를 늘여서.


종로3가역 10번 출구. 경로우대 카드로 찍는다는 게 신용카드로 찍고 어쩔 줄 모르니, 한두 번 그런 거 아니니까.


고객안전실 가면 취소시켜줘요. 어떤 분이 그런다. 거기 가본다. 5호선에서 또 카드 찍으셨네요. 할머니 다음부터 그러시면 안 돼요. 현금을 준다. 천원 지폐 한 장 오백원 동전 하나. 백원짜리 하나. 나 이럴려고 그런 거 아닌데.


젊은 역무원은 나무라듯 말하네. 대놓고 멸시의 눈빛으로. 이것두 ‘멸’자가 들어가니. 동전 지폐 받아든 나 대꾸한다. 아 할머니 맞네. 한마디가 저절로 나온다. 저 아직 애들이 출가 안해서 손자손녀가 없어요. 그래서 그런지 할머니 그 호칭 좀 낯선데 참 재미있네요. 그때서야 역무원 사과 비슷한 거 한다. 죄송해요 어르신. 사무적으로. 나 그 사과 원하거 아니예요. 할머니들 정말 바보 같지요. 재투성이 같지요.


장미꽃잎 물고기 가둔 걸까. 비 오기 전 그 맘 풀어보려고 젊은이들 따라 화선생 그집 들어가봐. 그러다가 원산지 표시 읽어보다가 나가. 물잔과 깍두기. 단무지 양파 춘장 놓이기 전 부리나케 돌아나와. 아 할머니 왜 나가세요. 기껏 들어와놓고. 할머니 좀 떨어뜨려 보려고. 젊은 기운 좀 훔치려다가.


49년을 교리 봉사했다는 바르톨로메오. 그는 쇠붙이와 도구의 성인. 이 늘어난 긴팔로 제주 세척당근 썰다 엄지손톱이 나갔어요. 이제 모든 게 느리고 말썽만 피우는 할머니가 저예요.


비 오기 전 장미꽃잎 속 물고기는 끅끅 울 것 같아. 물이 불면 물결에 기대지도 못하니까. 눈을 감고 쉬지도 못하는 두려움이니까. 장미꽃잎의 발열. 뺨에 솟으니까. 백지를 젖은 백지를 자꾸 얼굴에 붙이니까.


그러다가 불현듯 나를 떨어뜨려버렸다. 비는 어느덧 눈으로 바뀌어 버렸으니까. 스노우드롭 같아. 지하철 탈 때 에스컬레이터가 점점 싫어지는데. 하강한다는 게 점점 어려운데. 상승보다 하강이 어질머리인데.


스노우드롭snowdrop 설강화. 꽃잎 3개씩 두 쌍. 아담과 이브 쫓겨날 때. 놀란 어떤 천사가 눈 위에 떨어뜨렸다는 흰 종. 깨진 그 흰 종에서 우리의 고통이 나왔다. 울음이 나왔다. 할머니가 나왔다. 오늘의 어르신 할머니. 무형 아닌 유형 할머니가 존재했다.


마음은 무형의 것들을 쓰며 마음했다

-신진용, ‘없어질 행성에서 씁니다’


#할머니는슬퍼 #종로성당가는길 #종로3가3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