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가 한 철

-이면지 하나 펴놓고

by 시인 이문숙

펜인데 물 쏟아도 안 번져 시간 지나도 바래지 않아 근데 써보니 좋은데 뒷면에 배어나네 그러면 공책 뒷면 못 쓰잖아 아까워


특별한 때나 쓰라구 그 누구에게나 줘야지 써보니 말들이 종이에 스며들어 고서점 간서치들 고장에서 쓴다는 이 펜


쓸 땐 깨끗이 두 귀 씻고 책상에 앉아 하루 살아내느라 부서진 마음


우선 이면지 하나 펴놓고 써서 물 뿌려보아 마르면서도 글씨는 그대로야


가끔 나를 가지처럼 잘 씻어 접시에 올려놓고 보기


그사람 아픈데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그냥 안했다 해도 그사람 아프니 미안하다 한 마디만 해달라는데 그게 거짓말이니까 할 수 없다는 사람


특수반 선생님 같아 애들 해달라는 대로 하면 안 된다구 저 십년째 보조교사했어요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건 아픈 사람에게 도움이 안 된다구요


만일 저 가지라면 그렇게 말했을까 사실 아니라도 그사람 그렇게 들어 아프다면 미안하다 할 수도 있지


사실이 아닌데 어떤 귀는 들었고 어떤 입은 말한 적 없다는데 그 마음 써놓고 보니 번지지 않아


고서점 간서치들 고장 가지 튀김 명물이라는 그곳 음식 내는 접시 장식으로 놓은 가지 꽃 한 송이 사실 그 꽃 먹는 사람은 없지


쓸 때는 이면지 꼭 이면지여야 해 거기 써논 글씨 들여다 볼 때 뒷면에 배어드는 마음 알려면


저 가지꽃 지며 두고간 마음 그게 저 가지야 가지가 한 철이야


*코로나로 아들 여읜 엄마 엘리자벳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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