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아나는 봄,

-호수 일기

by 시인 이문숙

1.

아버지, 저 잉어 좀 봐. 엄청 크다. 그거 알아. 수족관 크기에 따라 걔네들도 제 등치 맞게 키운대. 금붕어는 금붕어대로 황금잉어는 잉어대로. 쟤 사람 얼굴 꼬옥 닮았다. 내 수족관 크기는 얼마나 될까. 아휴 숨 좀 쉬며 살고 싶다. 100군데 원서 집어넣었다. 근데 한 군데 연락이야.


2.

호수 가운데 저 섬. 토끼섬이래. 저 섬 외따로 지화자 늘어빠진 능수벚 봐. 그 꼭대기. 와, 까마귀 앉은 거 보여. 귀족 같다. 블랙핑크. 와, 저게 바로 블랙핑크네. 아파트아파트. 족제비가 알 깐 거 홀딱 먹어치울까 저기다 알 까라고. 아파트아파. 아, 정원 연못 가운데 섬, 저게 쟤네들 아파트네.


3.

좀 쉬어갈까. 엄마, 저거 보여. 오뎅탑. 우리가 여기 산 지도 30년이 훨씬 넘었네. 엄마두 팔팔했는데. 휠체어 없으면 거동두 못하니. 수양 버들 봄처녀였는데. 새 소리 참 좋다. 들려 엄마, 들리냐구. 가지 한 자락 잡고 검은지바뀌 도롱도롱 울고. 호수 가운데 제트 분수 솟다 고꾸라지고. 미관 광장 저 탑 때문에 엄마 보고 오뎅고치 사달라고 졸랐는데. 땀 뻘뻘 한여름 팔월에 말이야. 솜사탕 말구. 아이스케끼 말구. #


4.

오뎅탑의 원제는 ‘모빌Mobile’. 정발산은 음양사상에 의하면 양이다. 호수공원은 음이다. 그 가운데 중간자로서 이 조형물은 바람의 동력에 힘입어 수직 상승하는 기세를 상징한다.


5.

노인부부, 여자는 새색시 차림이다. 여보, 저기 저 벚나무가 더 예쁘다. 남자가 따라가며 고래고래한다. 그게 다 그건데. 뭘 자꾸 찍으라고.


6.

바닥까지 늘어진 서너 가지 붙잡고 한 아가씨 죽은 듯 누워 있다. 얼굴 파랗게 칠했다. 그 아래 습지는 뽀샵으로 처리할 것이다. 물이 찰랑찰랑할 것이다. 찔레덤불도 합성해 그려 넣을 것이다. 조명등 켜진다. 호수 물이 찰칵대며 수만 번 셔터 누른다.


7.

야, 그만 좀 찍어. 나 늦잠 자느라 머리 못 감고 나왔어. 괜찮아, 사진에는 냄새 안 나.


8.

메타세쿼이아 열매 주워 빙 둘러놨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남산제비 튤립 꿀풀 금창초에게 미안해서. 좀 밟아대지 좀 마라.


9.

깍 까악. 수만 사람 인파. 꺅. 책 읽는 여자 한 명 꺄악. 깔고 앉은 보자기 인동덩굴 문양. 까악. 빛 그림자 올 때마다 무릎 바꿔 세운다. 깍 깍 뭐라뭐라 쓰기도 한다. 유명한 영국 여자 작가. 꺄악. 깍. 그 이름 뭐지. 참나무 스툴 하나 들고 다니며 글 쓰던. 꺅. 폭풍의 언덕 히스클리프 말이야.


10.

잘 살아났다. 번개 맞았던 나무다. 고마워, 아무야. 아무개씨야. 버드나무 등치 만져본다. 아래서 거의 노숙했다. 썼다. 아하다가 네 하다가 아네모네했다. #일산호수공원 #봄덧 #인공호수 #거기서뭐하니 #한발짝을옮기는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