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물위쓴다찢는다

-남은 시간들

by 시인 이문숙

4.9(수)라고 일단 적는다.

비 사납다. 만화방창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너무 가물었으니 논에 물 대려면 이 비 흠뻑 젖어도 기쁘다. 추워 입은 겨울 코트 젖어 묵지근 치덕치덕하다. 아씨시 못 가니 정동 프란치스코 성당 간다.


다른 성소와 다르다. 가없는 성벽. 못 박힌 두팔 환호처럼 벌린 십자가상 보러. 고개 왼쪽으로 떨구지 않고 오른쪽으로 높이 젖혔다. 성벽 돌들 같이 굴러내리며 환호하는 것 같다.


Lp판처럼 리드미컬하게 돌아가던 호수는 멈췄고 물푸레 진공관 앰프가 희미해졌고 동요도 레퀴엠도 들리지 않았고

-이동우, ‘그해 겨울’


검은 성모 보러. 손때 탄 까만 맨발 아래 노란 초 노란 유채 노란 라넌큘로스. 켜진 노란 촛불. 시린 손 쬐였다. 따끈했다.


들어가는 순간 무슨 흰 가림막 못질하는 소리. 그래도 비 축축해 먼길 왔으니 들어갔다. 다른 때처럼 눈 감고 그 소리 들었다. 갑자기 엄마 49재 마지막 날. 쳐놓던 가림막 떠올랐다. 눈 떴다. 오늘 50주기구나. 그 추모제구나.


단칸방 아랫방이 호수 밑바닥처럼 차가웠고 형제들은 앞다퉈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고만 했고 죽은 사람도 만날 수 있다는, 그 잠들기 직전 길었고

-이동우, ‘그해 겨울’


51년 전 4월 9일 여덟 명 생목숨 앗아갔다. 4시 55분부터 8시 30분까지.


1975년 4월 9일. 나 고작 고 2 때. 뭘 알겠는가. 숄 자매 백장미. 세계사편력. 이런 걸 교사들과 공부하면서 조금씩 역사를 알게 되었다. 당시 여교장은 여교사를 거의 식모 부리듯 했다. 휴지 줍는 척 들어와 못마땅한 교사들 수업을 감시했다.


참지 못했다. 교사 단체에 참여했다. 조용히 큰 용기가 필요했다. 어디에나 흰장미 몇 송인 있었다. 89년에는 동생 잃어 식음 전폐한 나를 겨냥했다. 여름 방학 틈타 연락이 잘 안 되는 나를 직위해제했다. 엄마가 가서 복종 서약서 쓰고 학교에 복귀했다. 인사기록부에 빨간 줄. 학교 옮길 때마다 감시 대상자가 됐다.


여교감은 나를 집중으로 괴롭혔다. 둘째 애 가진 나. 국어 샘 H가 빨리 교장실로 내려오라고 했다. 교무부장이 남선생을 폭행하고 싸움 났다고. 2층 교무실 여선생들 우르르 내려갔다.


여교감이 유독 나에게 소리쳤다. 애 가진 여자가 여기 내려왔어. 나가. 공강 시간 책 읽고 공부하면 왜 다른 선생들과 수다 안하냐고 아니꼽다 비웃었다. 괴롭혔다. 그래요, 전 그런 사람이예요.


다른 학교 여교장은 전근 간 나를 불러 조용히 잘 지내자고 선수를 썼다. 딸 종일반에 찾으러 가야 하는데. 여선생 몇 명 교장실에 감금했다. 퇴근 못하게 했다. 우리 애가 기다려요. 제발 풀어줘요.


이상한 성금 모금. 아침독서 운동. 신문 강제 구독. 학생 인권 침해. 우리는 함께 일 생기면 모였다. 같이 다독거렸다. 매화 피면 매화 축제했다. 가을이면 동아리 대회했다. 나는 문학 동아리 ‘흰 가자미’. 너무 이름 생뚱맞아요. 백석 선우사에서 따왔다. 어린 무궁한 학생들 존중하려 애썼다. 조용한 백장미였던 우리들 몇. 교사 60여 명 중 5, 6 명. 소수였다. 버거웠다. 때로 죽을 것 같았다.


정년 10년 앞두고 퇴직했다. 흔히 우스개한다. 새끼들 애지중지. 우리 너무 학대 받아 골병 들었어.


서이초 여교사 땐 너무 울었다. 흰 국화 사이 분홍 하늘나리 몇 송이. 근조화환 보고 무너졌다. 누가 날 알겠는가. 그 무서움. 갇힘. 사나운 말들의 군무.


사람만 체온을 가진 게 아니라 손수 짠 털스웨터를 바람에게 입히던 어머니 자식들 눈동자에서 잃어버린 호수를 찾으려 했고

-이동우, ‘그해 겨울’


일찍 호수에 간다. 비에 몸이 분 호수. 출렁인다. 멈춘다. 다시 흐른다. 그해 겨울 호수. 언다. 녹는다. 봄 호수 여름 가을.


호수가 다르게 보인다. 겨울 지나 수장되었을 많은 것들. 꿈 정의 존경 숭엄.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 아씨시는 못 가고 포목상 아들 프란치스코. 안다모른다알아간다복종서약서쓴다찢어발긴다. 호수 꿀렁댄다. 흐른다흘러간다흐른다흘러온다. 성벽 돌 와르르 무너진다.


#사회참여 #여교사들 #학교는달라져야해 #교사가면우울증 #서로돌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