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와 위장색

-쓰지 구니오와 미즈무라 미나에의 '필담'

by 시인 이문숙

7월 우기에도 젖지 않는 벤치가 있네. 위장색의 목도리도마뱀처럼 나무 옹이도 잎맥도 있는 벤치.

잎맥은 광맥처럼 멈출 줄 모르고, 우리는 촘촘한 체 하나씩 들고 그 어두운 벤치 앞에 섰네.

사금 한 알갱이라도 얻으려는 사랑의 구걸자들처럼. 한 켤레의 완벽한 흙탕물들이 위로위로 흐르고, 그 회오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네.

초여름밤 벤치에 엎드려, 쓰지 구니오와 미즈무라 미나에의 '필담'을 읽는다네.

1997. 6. 29. 어느 초여름, 미나에는 '겐지 이야기'에 대해 쓰네. 우아, 으스스, 요염, '반딧불이의 권'에 나오는 어떤 '범해짐'에 대해 쓰고 있네.

그 벤치는 시멘트로 주조된 벤치. 나무 옹이도 있고 이파리도 있고 나뭇결, 나이테도 있는 능란한 속임수의 벤치. 반짝하는 사금도 그속에는 섞여 있다네. 믿을 수 없는 순도 99%의 시멘트 벤치.

미나에는 초여름밤 편지를 쓰네. 그 시대는 여자 얼굴을 볼 수 없는 금지된 시대. 겐지가 짝사랑하는 다마카즈라는 늘 발 속에 숨어있어 얼굴을 볼 수가 없다고. 그래서 겐지는 커다란 이파리 조롱에 반딧불이를 모은다고.

이 세상에서 가장 향긋한 향이 피어오르던 밤, 겐지는 그 밤으로 스며드네. 겐지는 발을 고치는 척, 모아두었던 반디를 풀어 다마카즈라를 보네. 순간 그녀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지만,

'필담'을 읽는 여자는 벤치에 엎드리며, 시멘트 벤치처럼 절대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 위장색 속에 끝끝내 머물려 하네.

여자는 벤치에 누워 옹이에 붙어있던 잎맥을 하나하나 뜯어내네. 서랍 속에서 우기의 기운을 품고 급속도로 자라나는 잎맥의 편지.

단단한 시멘트에 손톱은 꺾이고 손바닥 핏줄은 터지고 살갗이 벗겨지네.

미나에의 편지를 초여름밤 읽네. 다마카즈라는 놀라 얼굴은 가렸지만, 엎드린 모습을 반디의 환한 빛은 놓치지 않았다고. 그 우아, 으스스, 요염. 그것을 본 겐지는 더욱 그녀에게 매혹되었다고.

사금을 사들이는 졸부처럼 서랍은 그 오랜 시간 무엇을 그러쥐려고 주섬주섬 편지를 모으며 삐꺽거렸던 걸까.

지나가는 글자들, 저벅저벅거리는 조바심들. 우둔하고 미흡한 관점들.

그러나 기억의 환등기 속에는 어떤 '설핏'이 환하게 피어있네. 흰 반딧불이의 '범해짐'과 어슷한.

벤치의 여자는 뿍뿍 오래된 서랍 속 편지를 찢다 손아귀가 아파, 급기야 세단기를 사러 초여름밤을 달려나가네.

그깟 편지를 버리면 되지, 누가 주워 읽는다고. 왜 세단기를 사야 하는지 모르면서. 세탁기도 세면기도 아닌 그 한 번만 쓰고 버릴 세단기를.

이런 여자를 보며, 만일 미나에가 편지를 쓴다면, 어떤 편지를 쓸까.

세단기는 덜덜거리고, 편지가 조각조각 파쇄되는 동안, 종이가 너무 아플 것 같아요. 차라리 세탁기에 급속 코스로 빨래해 버리세요.

그러면 어떤 사연이었는지, 글자는 사라지고 종이만 남아, 조립식 빨래대에 형광빛 흰 색으로 펄럭이겠지요. 반디의 '범해짐'과 같은 희한하고 환한 추억으로.

감정이 굳은 시멘트 벤치의 위장색에 누워 있는 여자는 세단기를 사러 왜 초여름밤 밤길을 달려 나갔을까.

우기에 나무 막대기로 위장한, 한 목도리도마뱀처럼 편지를 손으로 찢다찢다가 세단기를 사러 초여름밤을 쉬이쉭 찢으며.

미나에는 초여름 밤 편지를 쓰네. '그 벌레는 사랑스럽게 반짝반짝 점멸하며 여인을 비춰내지만, 거기 남의 눈이 있기에 '범해진다'고. 그러니까 반딧불이 비춰낸 것은 '범한다'는 상징성 그 자체라고.'

우리가 말을 나눌 때, 감정의 위장색을 벗겨내면, 반딧불이의 '범해짐'이 반짝반짝하는 편지가 초여름밤 하늘에 펼쳐진다. 누옥의 글자가 뚝뚝 진다.

미나에가 초여름 밤 편지를 쓰네. 아무리 추억이 아프더라도, 세단기는 사지 말라고. 추억을 파쇄하지 말고 '반딧불이'를 모으라고. 그 '범해짐'의 화락화락한 환등기를 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