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운동의 시작 : 4•19 혁명
한국 현대사
▮ 발췌개헌을 넘어 사사오입 개헌으로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투표율은 91.9%를 기록했다.
국회의원 당선자 중에 이승만 지지 세력은 총 210석 중에 단 57석뿐이었다.
북한군의 남침 한 달 전의 상황이다.
이승만 정부가 민심을 잃고 여론이 악화된 주된 원인을 두 가지로 본다.
선거 1년 전인 1949년, 친일 반민족 행위자 청산의 좌절과 김구 암살에 이승만이 연관되어 있다는 설의 확산이다.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헌법이 정한 국회에서 대통령을 뽑는 방식(간선제)으로는 이승만의 두 번째 대통령 당선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지지기반을 넓히고자 자유당을 창당하고 직선제(국민 직접 선거)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병을 동원하여 개헌에 반대하는 국회의원이 탄 통근버스를 강제 연행하였으며, 일부 국회의원을 간첩으로 몰아 구속하였다. 이러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개헌안을 기립 표결로 통과시켰다(발췌개헌. <헌법> 1차 개헌. 1952.7.). 1952년 8월 5일, 국민 직접 선거로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간 이승만 정부가 북한을 적대시하며 반공을 강조해 왔고 마침 북한과의 전쟁으로 임시 수도 부산이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6•25 전쟁 이후 자유당은 이승만의 영구 집권을 위해 이승만 대통령에 한해 연임 제한을 없애자는 내용의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야당을 압박하고 조별 투표와 무소속 포섭 등의 방법으로 표를 모았으나 헌법 개정에 필요한 국회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인 135.333……명 이상의 찬성표가 필요한 데 찬성 135표가 나와 1표 부족으로 부결이 선포되었다. 이틀 뒤에 자유당은 소수점 이하의 숫자는 1인이 될 수 없으므로 소수점이 0부터 4까지는 버리고 5부터 9까지는 올려서 반올림하는 일명 사사오입(반올림)의 논리를 내세워 개헌안이 통과되었다고 선포하였다(사사오입 개헌. <헌법> 2차 개헌. 1954.11.). 이 헌법에 따라 이승만은 1956년 5월, 제3대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 민주당 신익희 후보가 선거를 앞두고 호남 지방에 유세를 위해 이동 중에 기차 안에서 심장 마비로 사망하면서 이승만이 세 번째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때 무소속 조봉암이 216만여 표로 30%에 달하는 지지를 얻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경쟁자로 떠올랐다. 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장면이 자유당의 이기붕을 누르고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 반공을 앞세운 독재 강화
조봉암이 평화 통일을 주장하며 진보당을 창당하자 이승만 정부는 조봉암에게 간첩 혐의를 씌워 사형시켰다. 조봉암은 강화도 3·1 만세운동과 중국을 무대로 벌인 반일 운동 등으로 여러 차례 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다. 그는 광복 뒤 초대 농림장관으로 농지개혁을 주도했고, 국회부의장을 대통령 후보로 나선 인물이다. 2011년 대법원에서는 조봉암의 간첩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국가 보안법 개정으로 정부 비판 세력을 탄압하였으며 언론 통제에 나서 <경향신문>을 폐간하였다. 더 나아가 독재 체제 강화를 위해 동 단위로 국민반을 조직하여 국민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강화했으며 정부 정책 선전, 선거 등에 동원하기도 하였다.
▮ 3 • 15 부정선거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후보인 조병옥이 사망하면서 이승만 대통령 당선이 확실해졌다. 당시 86세인 이승만의 건강에 문제가 생길 경우, 헌법에 따라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잇게 된다. 이전 부통령 선거에서 이전 선거에서 당선된 민주당 장면을 누르고 자유당은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온갖 부정을 저질렀다. 3인조•9인조 공개 투표, 사전 투표, 투표함 바꾸기 등 온갖 부정을 저질렀다(3•15 부정 선거). 그 결과 이기붕이 100%에 가까운 득표율이 나오자 79%로 조정하기도 하였다.
시민들은 부정 선거에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선거 유세 중인 2월 28일(일요일), 대구에서 민주당 후보 정치 집회 참가를 막기 위해 학교 등교를 지시하자 대구 지역 고등학생의 시위(2·28 민주 운동)가 있었다. 이를 계기로 중·고등학생의 시위가 확산되었고, 선거 당일인 3월 15일에는 전국에서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경찰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4월 11일, 시위에 참여했다가 실종되었던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머리에 최류탄이 박힌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자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하며 시위는 더욱 거세졌다.
▮ 4·19 혁명,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다
4월 19일에는 서울에서 학생과 시민 수만 명이 시위에 나서 대통령과 면담을 요구하며 경무대(대통령 집무실, 4·19 혁명 이후 청와대로 이름 바꿈)로 향하였다. 이에 경찰의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115명 죽고 725명 부상)
시위가 격화되고 전국으로 퍼지자 이승만 정부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였다. 하지만 시위대를 마주한 계엄 사령관은 군대에 발포하지 말도록 지시하였다.
4월 25일, 대학교수들이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날 것과 재선거를 요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한 뒤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 평가
국민의 힘으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민주 혁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