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피살(10·26 사태)되자 비상국무회의를 열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소장(국군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육군사관학교 11기생이 조직한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가 반란을 일으켜 계엄사령관이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하고 군부 내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12·12 군사반란). 신군부의 정권 장악에 맞서 학생과 시민들은 ‘비상계엄 해제’,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며 전국에서 시위를 벌였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 앞에 30개 대학교의 학생 10만여 명이 모여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때 학생 대표들은 신군부가 정치에 개입할 구실을 줄 것을 우려하여 시위를 멈추고 학교로 복귀할 것을 결정하였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비상계엄을 확대하였다. 이 발표 직전에 전국 대학 총학생 회장단 회의에 참석했던 전국 55개 대학교 학생 대표 95명 중 서울 지역 회장단 전원이 연행되었고, 김대중을 비롯한 26명의 재야인사와 정치인들이 체포되었다. 이로써 10·26 사태 이후 민주화의 기대가 높아졌던 ‘서울의 봄’은 막을 내렸다.
▮ 5·18 민주화 운동
광주에서의 시위도 계속 이어져 왔다. 5월 16일에는 3만여 명의 학생·시민들이 ‘비상계엄 해제’,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는데, 이들은 도청 앞 분수대에서 횃불 시위를 한 뒤 각자의 길에 전념할 것을 결의하고 해산하였다.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휴교령이 선포된 18일 아침, 교내로 들어가려던 전남대학교 학생 200여 명은 이미 주둔하고 있던 계엄군의 강압적인 제지에 맞서 투석전을 벌였다. 흩어지는 학생들을 뒤쫓아 가 곤봉으로 구타하고 과잉 진압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며 시위대가 늘어났다. 19일 시위대 수가 5,000여 명으로 늘어나자 계엄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소총에 곤봉과 칼을 부착하고 진압에 나섰다. 중·고등학교에는 임시 휴교 조치가 내려졌다. 20일 오후 시내 중심가에 3만여 명이 모여 농성을 벌였으며, 250여 대의 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도청을 향해 시위했다. 이날 밤에는 20만 명에 육박하는 시민들이 군대와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시청 건물을 장악했다. 계엄군은 외부로 통하는 모든 시외전화를 끊어버렸고, 지역 신문사의 편집도 중단되었다. 밤 11시경 계엄군은 건물 옥상에서 조준 사격에 들어갔다. 시민들 사이에 무장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주변 지역의 경찰서와 군부대 등에서 무기를 탈취, 21일 오후 3시경부터 시민들에게 무기가 지급되며 ‘시민군’이 등장했다. ‘시민군’과 ‘계엄군’은 총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시민들은 날마다 도청 앞에 모여 ‘민주 수호 궐기대회’를 열었다. 26일 새벽 계엄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하였고, 항쟁 10일째인 27일 자정을 기해 광주시 외곽도로를 봉쇄하고, 2만 5,000명의 전투 부대를 투입하여 무력 진압 작전을 개시했다. 오전 5시에 전남도청에 있던 시민군이 투항했으나 20여 명은 끝까지 싸우다가 오후 2시경 전원 사살되면서 5·18 민주화 운동이 끝났다.
전남 도청 별관
사망자 및 행방 불명자는 200여 명이고 부상자 등 피해자는 4,300여 명이다.
1997년, 5월 18일이 국가 기념일이 되었다(5·18 민주화 운동 기념일).
▮ 신군부, 불법적으로 정권 장악
신군부 세력은 5·18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5월 31일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여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였다. 민주화 주장하는 교수와 교사 해직, 언론사 통폐합, 삼청교육대 운영 등을 통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전두환은 8월 16일에 최규하 대통령을 재임 8개월 만에 물러나게 하고 8월 22일 육군 대장으로 전역한 뒤 8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대통령 선거에 단독 후보로 나서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525명 중의 2,524명의 찬성을 얻어 9월 1일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0월 22일에 전두환은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 간선제와 대통령 임기 7년 단임제를 골자로 한 헌법개정안을 만들어 국민투표로 확정했다. 1981년 1월 15일, 전두환을 총재로 한 민주정의당이 창당되고 대통령 후보로 나서서 선거인단 90.2%의 압도적 지지로 얻고 1981년 3월 3일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로써 제5공화국이 출범하였다.
▮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다
전두환 정부는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사람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하고, 대학교에 경찰을 머물게 하였으며, 학생 운동에 참여한 대학생을 강제로 입대시켰다. 보도 지침을 내려 언론도 통제하였다(사건의 보도 여부, 보도 내용, 기사의 내용과 실리는 위치, 제목 사진 내용까지 지시. 땡전 뉴스라 하여 제5공화국의 전두환 정권 시절 뉴스를 빗대는 말로, 당시 뉴스에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의 활동 기사를 맨 먼저 보도한 데서 나온 것).
한편으로는 정권에 대한 반발을 의식해서 야간 통행 금지(0시부터 4시) 전면 해제, 중·고등학생 두발과 교복 자유화, 프로 야구단 및 축구단 창단 등을 통해 달래고자 하였다.
▮ 민주 시민, 전두환 군부 독재 정부에 저항하다
학생들은 5·18 민주화 운동 당시 미국이 신군부의 병력 동원을 방조했다고 판단하여 반미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5·18 민주화 운동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주장하면서 전국적인 학생 조직인 전국 학생 연합을 결성하였다.
김영삼, 김대중 등 정치인들은 민주화 추진 협의회를 조직하고 신한민주당을 창당하고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천만인 서명 운동을 벌이며 정부를 압박하였다.
직선제 개헌 운동의 열기가 더해지자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거나 북한이 금강산댐을 건설하여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려고 한다는 등 안보 위기를 조장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강경하게 탄압하였다.
1987년 1월에는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구속된 서울대 재학 중인 대학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전두환 정부는 박종철 군에게 친구에 대해 묻던 중 책상을 탁 치니 억 소리를 지르며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사망했다 하면서 고문 사실을 은폐하려 하였다. 이에 학생과 시민들은 진상 규명과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전두환 정부를 규탄하였다. 4월 13일, 기존 헌법에 따라 간접 선거로 다음 대통령을 선출하여 정권을 넘기겠다고 발표하였다(4·13 호헌 조치-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 선거를 유지하면 사조직 하나회를 통해 정권 유지가 가능하다. 12·12 군사 반란 지휘관도 전두환 · 노태우 포함 17명이었고 육군사관학교 12기부터 내려가면서 회원은 기수마다 서너 명씩 이어져 있었다. 전두환 다음 노태우 그다음은 그들 나름의 순번대로 진행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사람이 한 번만 하는 것으로!)
개헌 투쟁은 교수, 학생, 시민뿐만 아니라 노동자, 농민 등이 함께하며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갔다.
▮ 6월 민주 항쟁, 민주주의 시대를 열다
5·18 민주화 운동 7주년 기념일인 1987년 5월 18일, 야당 정치인과 종교 단체, 대학생 등 민주화 운동 진영은 총결집하여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고 천주교 정의 구현 전국 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조작되었음을 폭로하였다(경찰 5명의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로 밝혀짐).
5월 27일, ‘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 본부’ 발대식에서 군사 독재 정권을 몰아내고 민간 민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성공적인 국민운동을 다짐하고 ‘호헌 철폐’와 ‘민주화’를 주장하는 항쟁을 펼쳐 나갔다. 전두환 정부는 ‘4·13 호헌 조치’를 고수하면서,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 지명 대회를 준비했다. 6월 9일, 연세대학교 대학생 이한열이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 대회’ 참석 후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았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이 군을 동료 학생들이 부축하는 모습이 현장에 있던 외신기자의 카메라에 찍혔고 전 세계로 전송되었다(88 서울 올림픽을 앞둔 상황). 이를 계기로 시민과 학생들은 더욱 힘을 모았다. 그러나 전두환 정부는 6월 10일, 전국 경찰에 비상령을 내리고 재야인사를 감금한 가운데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가수까지 동원해 분위기를 돋우며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6월 10일, 국민운동본부의 방침에 따라 이날 오후 6시 민주화를 요구하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교회 종소리·함성·박수 소리 등으로 전국이 요란했다. 이날 시위는 전국 514곳에서 벌어졌다. 이후 28일까지 19일 동안 거의 매일 전국 30여 개 시·군에서 연인원 400만~500만 명이 시위에 나섰다.
시위는 26일, ‘민주 헌법쟁취 국민 평화 대행진’을 계기로 절정으로 치달았다. 전국 38개 시·군에서 개최되어 경찰은 이날 시위에 100만 명 이상이 참여한 것으로 집계했다. 노동자와 농민, 학생, 상인, 정치인, 문화 예술인 특히 ‘넥타이 부대’로 불린 직장인과 시민들의 참여는 당시 전두환 정부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국민의 요구에 굴복하여,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 언론의 자율성 보장, 정당 활동 보장 등을 약속하였다(6·29 선언 → 1987년 10월, 헌법 제9차 개헌- 대통령 직선제, 대통령 임기 5년, 단임제)
6월 민주 항쟁은 군부 독재 정권에 맞선 학생과 정치인뿐만 아니라 농민과 노동자 등 모든 시민이 참여한 민주화 운동이었다. 이후 사회 각 분야에서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근본적인 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