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도 4시 반, 어제도 4시 반, 오늘도 4시 반. 이러다가 이 시간이 기상 시간으로 굳어지지 않을까 걱정을 하는 나를 보니, 요즘 내가 어지간히도 걱정거리가 없나 보다. 이 새벽에 깨니 오만가지 잡생각과 잡소리를 늘어놓게 된다.
가만있어 보자, 내가 최근에 무얼 했나 찬찬히 되짚어 본다. 이 시간에 이런 되짚음은 보통 득보다는 실이 많지만 휴대폰에 깔린 온갖 sns 어플을 다 훑었더니 할 일이 이것뿐이다. 나는 요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집에 틀어박혀있다. 그런데 또 외출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빵을 만들어서 먹고, 미뤄뒀던 집의 구석을 청소하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가지 못했던 옆 동네 맛집을 갔다. 정말 그 바이러스라는 것이 오기 전보다 더 많은 것들을 하고 있다. 바이러스가 이렇게까지 위험해지기 전에는 정해진 일과가 있어서 더 단출한 하루를 보냈는데, 요즘은 하루하루 무얼 할지 늘 생각하고 못 했던 것들을 하느라 분주하지만 바쁘진 않다. 이런 걸 선순환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나는 조금 그렇다.
집에 있는 시간이 전보다는 늘어서 집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고 집구석 구석을 더 살피게 된다. 남편과 나는 월세를 내는 집에 살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집은 높은 지대에 있는 다세대 주택이다. 방이 3개, 화장실이 1개인 이 집은 등기를 떼어보니 지어진 지 10년은 가뿐하게 넘긴 집이었는데 기억이 잘 안 난다. 이 동네에서 남편과 내가 원하는 조건으로 집을 몇 군데 보았지만 여기가 새로 도배장판이 되어 있어서 가장 깔끔하고 넓어서 선택했다. 집을 볼 때는 늘 뭐 하나에 꽂히면 함께 딸려오는 것들은 갑자기 투명해졌다가, 막상 살기 시작하면 투명해진 것들이 그 존재감을 드러내며 서서히 짙어진다. 이것이 참 웃기다. 이 집도 그랬고, 남편이 혼자 살던 예전 집들도 그랬고, 내가 살던 이 전의 집들도 그랬다. 물론 집을 옮기는 횟수가 더해질수록 나아지고는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나와 남편의 생활 성장이라고 생각하니, 우린 이제 초등학교 몇 학년쯤일까 생각하게 된다. 느리지만 천천히 어떻게든 성장하고 있다는 게 가끔은 닭살이 돋을 만큼 뿌듯하고 신기하다.
오래된 집에서 ‘쾌적하게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노동력 혹은 돈을 필요로 한다. 요즘 새로 짓는 집들은 그 노동력을 줄일 수 있도록 관리가 용이하게 짓지만, 오래된 집들은 그런 배려가 없다. 나의 특기이자 단점은 어디 가서 ‘이건 뭐가 문제네, 뭐가 이상하다.’라고 파악하고 늘어놓는 것이다. 이런 오래된 집에 살면 나는 말이 많아진다. 화장실 바닥과 거실 바닥의 단차는 왜 이러하며, 바닥 타일을 바를 때 벽타일 부착용 세라 픽스를 발라서 바닥 타일이 깨졌고, 보일러실 겸 세탁실 뒷베란다에는 왜 이렇게 큰 구멍이 말도 안 되게 나있는 것이며.. 등등. 안 그래도 말 많은 내가 더 말이 많아진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을 한다. 보통 그 집중이라는 것이 시작되는 건 집에 살게 된 지 1년이 지나면서부터다. 1년이라는 시간이 대체로 내가 집을 파악하게 되는 시기다. 그리고 이 집을 내가 잔소리 덜하도록 꾸며나가는 것이다. 버리는 구석에 맞는 선반을 사서 공간을 메꾸고, 뒷집 노란 전구 빛을 견뎌줄 커튼을 만들어 달고, 대충 아무렇게나 쓰던 뒷베란다에 화분 선반을 놓기 위해서 2시간 동안 청소를 한다. 근 3일 중에는 뒷베란다 창문을 떼어서 물청소를 했다. 중노동에 가까운 청소를 했는데도 새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보다 이 집이 점점 더 좋아진다. 이제야 겨우 내가 좋아할 구석이 생겨버려서 요즘은 점점 더 그렇다. 사물에 정이 든다는 게 이런 것일까.
요즘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말을 몇 번 썼는데 내 생활이 실제로 그렇다. 이 오래된 집에 나를 맞춰가고 있다. 문득 삶이란 것도 세상을 나한테 맞추는 게 아니라 나를 세상에 맞게 끼워 넣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그래도 늘 ‘더 나은 것’을 향해 나아가겠지만 가끔은 이렇게 주춤하면서 낡음을 느끼는 것이 내 삶의 건강 보조제라 생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