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s after love?! No, after growth.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하나의 존재에서 껍데기와 알맹이로 나눠지고, 알맹이는 하나의 소중한 생명 그리고 껍데기는 훌륭한 보호막이 된다. 생명은 에너지를 품어 돌리고 껍데기는 점점 굳어서 생명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깨버려야 하는 틀이 된다. 이 세상의 다른 생명들을 만나기 위해 알맹이는 자신이 처음 만난 공간을 부숴버리게 되는 것이다. 사람 아기가 탄생하는 것도 비슷하다.
그 뒤로도 몸과 마음을 키우는 성장을 하며 몇 번의 돌아오지 못할 파괴를 경험하게 된다. 이는 거쳐야 하는 관문 같은 것이라 깨진 알의 잔해를 보며 슬퍼할 일이 아니라 다 같이 축하를 건넬 일이다. 알은 의외로 단단하지만 뾰족한 작은 틈이 생기면 전체의 균열로 이어지도록 만들어져 있다. 깨진 후의 껍데기는 흙으로 돌아가면 쓰레기가 아닌 거름이 된다. 알이 보호에만 힘쓰고 단단하게 만드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생이 뚫고 나오지 못한다. 생을 가두게 되면 둘은 함께 썩어가 소멸에 이르게 된다.
성장이라는 것은 이렇게 둘이 조화를 이뤘다가 한쪽은 약해져 무용지물이 되고 다른 쪽은 그다음 단계로 가는 마치 게임 같은 단계를 거친다. 각 단계를 거치는 내내 서로 엎치락뒤치락 싸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쪽이 다른 쪽에 끊임없이 양보하며 성장에너지를 잘 흡수하여 소화하도록 안내하는 과정에 가깝다. 그래서 아이는 아이를 성장시킬 수 없다. 깨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껍데기는 같이 삼도천 다리를 건너자고 덤비는 물귀신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쉽게 깨지는 것을 허락하는 껍데기가 좋은가? 그것도 아니다. 쉽게 깨지는 알에서 자란 새는 허약체가 될 것이다. 너무 작게 만들어진 껍데기는 자만감을 만들고, 지나치게 큰 껍데기는 주는 쪽과 받는 쪽 모두가 다 지쳐서 깨고 나올 만큼 성장하지 못하고 좌절하게 된다.
어린 나이의 성장은 양육자와 함께 진행된다. 탄생할 때 몸이 하나였던 것처럼, 아기들은 엄마를 자신과 하나인 존재로 인식한다고 한다. 그게 깨지는 시기는 처음으로 'No!'를 외치기 시작할 때다. 대부분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쯤이 피크인 것 같은데, 상당히 귀여워지는 시기에 반항?을 하니 양육자의 마음은 찍히고 찢어져서 너덜너덜해진다. 그리고 몇 번의 미운 0살을 지나서 사춘기에 분리가 되어버린다. 그때부터는 자신의 마음속에 알이 생기는 것이다. 내가 나의 양육자가 되어서 나를 성장시키고 세상도 그런 나를 인정하여 법적으로도 성인이 된다. 이제 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제 새가 다 자라서 어디든 갈 수 있는 성체가 되었으니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성장 이후의 성숙은 각자의 몫이다. 비교하고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 같지만 실은 사람들은 서로에게 그다지 큰 관심이 없다. 날고 싶은 만큼 날다가 힘이 빠져 바다에 빠지던, 무서워서 둥지에만 숨어서 살던, 날개가 있는데 얇은 두 다리로 뛰어다니던, 황새를 쫓아가다 다리가 찢어진 뱁새가 되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으니 원하는 대로 하면 된다.
제한 없이 마구 날아보고 싶다는 상상을 할 때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은 어디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