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좋아

밀도가 높아도 좋고 여백이 많아도 좋아.

by 해날

어떤 이야기는 모든 것이 꽉 차있어서 그대로 따라가며 그저 함께 하면 되어서 좋다.

인물 설정도 더하거나 뺄 것이 없고, 일어나는 사건들도 적재적소에 잘 배치되어 있고, 전개도 강약의 변주가 살아있는 템포로 진행되며, 반전도 간간이 나오면서, 굵직한 줄거리와 자잘한 떡밥도 모두 잘 어우러지고, 적당한 시점에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결말로 끝나는 이런 이야기는 듣고, 보고, 읽는 이의 만족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이런 이야기를 만나면 정서적으로 잘 차려진 성찬을 먹은 듯 심리적 포만감을 느낀다. 나도 그 이야기에 한 부분이 되었던 것처럼 나의 경험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책을 읽고, 영상을 보는 것이 간접 경험을 하는 일이라고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난 숭덩숭덩 잘려진 이야기도 좋아한다.

여백이 가득해서 그림을 다 그린건지 낙서를 한 건지 모르겠는 수준이라고 해도 그 작은 그림이 나의 마음에 들어온다면 그래서 나의 상상력을 움직인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뭔가 많이 빠진 듯한 전개는 내가 다 채울 수 있다. 오히려 '이런 사건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면서 여러 가지로 상상하는 재미를 누릴 수 있다. '인물의 마음이 이렇지 않았을까?' '이런 마음이 더 커지지 않았을까?' 하면서 작가가 의도한 것보다 더 애절해지기도 한다. 가끔은 그렇게 곱씹으며 상상으로 채워 넣은 이야기를 더 즐기기도 한다. 굳이 끼워 맞춰 보자면 노래가사가 이런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좋아하는 책의 원하는 구절을 읽기 위해 페이지를 이리저리 넘겨보는 것처럼 어떤 노래는 듣자마자 내 기억을 펼쳐서 열어버린다. 머릿속에 맴도는 그 구절이 쓰여진 내 인생의 어느 시점으로 나를 데려가 버린다. 그 노래가 항상 내 귓가에 맴돌던 어떤 시절일 수도 있고, 그 가사와 같은 경험을 했던 어느 날 어느 순간일 수도 있다. 사람의 추억은 언어가 아닌 감정으로 쓰여져 있기에 그 노래는 나를 설레게 하기도 하고 눈물 쏟게 하기도 한다. 노래 가사가 비워놓은 부분을 각자가 자신의 감정과 경험으로 채워 넣으며 자신만의 이야기로 만들어 기억하게 된다.

아직 부족함이 많은 나는 가사가 없는 음악이나 미장센으로 말하는 영화는 어렵다.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벅찬 감정을 느낀 적은 있지만, 눈물을 흘린 적은 없다. 화면의 배치와 미장센으로 이야기를 채우면 죄송하게도 이해하지 못한다. 'OO 영화제 수상작'은 나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 영화라는 얘기다. 글도 시는 아직도 힘들다. 함축적인 의미를 잘 모르겠다. 언젠가 부족함이 채워져 그저 이해하게 되는 날이 오기는 할지 의심스럽다. 그러기를 바라는 것이 욕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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