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살이 1년, 영국 살이 2년. 도합 3년을 유럽에서 살며 일하며 배운 것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좀 더 이기적으로 사는 것' 일 테다.
영국에 와서 알았지만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았던 나는 항상 남의 비위를 맞추고, 남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노력하고, 남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려 애쓰고 노력했던 것 같다.
정말 아이러니한 점은 나는 한국에서 여자치고 자기주장이 센 편이라는 평가를 들어왔다.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내 신념, 철학과 고집이 확실한 편이었는데, 그런 내가 영국인이나 스웨덴인에 비하면 아직 한참은 소극적이었다는 것이다.
집을 구하는 것, 연봉을 협상하고 내가 원하는 직장을 찾는 것, 연인을 만나는 것... 나는 인생사 모두가 결국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그 기준을 절대 타협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행복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행복해지는 법은 이토록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 쉽지 않다. 왜? 첫 번째,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뭔지 모른다. 라캉이 말했듯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평생 남이 좋다고 말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 믿으며 묻지도 따지지 않고 살아온다.
두 번째는 스스로를 알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도, 그걸 지키는데 용기와 기다림,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선 한국인들 (동양인들의 공통적 특징인지는 모르겠으나)은 개개인의 행복과 요구를 당당히 표현하는데 익숙지 않다. 항상 조직과 공동체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에 우선하는 습관에 길들여져, 내가 원하는 것이 있어도 표현하지 못한다. 단적인 예로 부장님이 자장면을 시키면 모든 사원이 자장면을 먹는 것처럼.. 연봉협상이라 표현해도 대부분의 한국의 대기업들이 정해진 연봉을 사원들에게 '일방적 전달'하는 것처럼...
내가 원하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그걸 당당히 표현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그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내 기준을 낮추고 나를 바꾸기보다, 그냥 그 기회가 오기까지를 여유롭게 기다리는 인내와 여유.
행복의 기준 낮추지 않기 1. #런던에서 집을 구했을 때의 이야기
런던에 처음 살 집을 구했을 때, 나는 내가 영국에 아는 이 한 명 없이 왔기에 하우스메이트들과 친해질 수 있는 그런 집을 구하고 싶었다. 그때는 아직 직장도 없을 때여서, 혈혈단신 외국인인 내가 친구를 만들 수 있는 길이 한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호스텔에 묵으면서 일주일이라는 지금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집을 구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하루 평균 5-6개의 집을 보러 다녔다. 한국 워홀/유학생들이 보통 3일-일주일 안이라는 짧은 시간에 집을 금방 구하는 편이긴 하지만, 사실 나는 이 방법을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사람이 마음이 급하면 보통 좋은 결정을 내리기 힘들기 때문이다.
채광, 렌트비, 동네의 치안 등등 다양한 리스트가 있었으나 당시 나는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고 집 계약을 빨리 해결하고 싶은 나머지 내 마음에 100% 들지는 않아도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집과 계약을 하기로 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 집에 살고 있는 플랫 메이트들이 서로 너무 친해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원래 런던의 집은 다 그래. 친구는 플랫 메이트로 만드는 게 아니야."
당시 집주인은 내게 그런 말을 했다. 실제로 나의 첫 런던 집은 플랫 메이트들끼리 그 흔한 "Hi" 인사도 하지 않는 삭막하기 그지없는 집이었다. 나는 그들과 친해지려 많은 노력을 했지만 항상 일방적인 나의 노력만으로 끝이 났다. 결국 나는 그 집에서 나왔고, 한 달 반을 공들여 이사를 간 두 번째 집에서는 플랫 메이트들과 정말 가족같이 지냈다.
런던에 2년 살아보니, 예전 집주인의 말은 절대적으로 맞지 않았다. 그 사람은 단순히 자신이 아는 경험과 범위 안에서만 말을 했을 뿐이다. 플랫 메이트들과 가족처럼 지내는 집도 있고, 서로 1도 신경 안 쓰는 집도 있고, 그냥 가끔씩 캐주얼하게 이야기만 하는 집도 있고. 정말 다양하다.
내가 행복의 기준을 낮추면 오히려 서글퍼지는 건 나일뿐이다.
행복의 기준 낮추지 않기 2. #연봉과 직장
런던에 처음 와서 직장을 구했을 때 인터뷰에서 면접관들이 희망연봉을 물어보면 나는 뭐가 그리도 참 죄송하고 미안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보다 낮춰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이것도 정말 한국인 여성스러웠던 것이, "내가 원하는 걸 당당히 말하는 삶"에 나는 참으로 익숙지 않았던 것이다.
코로나 판데믹으로 인해 영국인이고 외국인이고 너도나도 해고를 당하고 모두가 직장을 구하기 어려운 시절은 더했다. 사람이 절박하면 판단력이 흐려진다. 그래서 나도 내가 지난 회사보다 받던 연봉보다 낮춰야 하나 고민을 했다. 실제로 면접에서 내 희망연봉이 자신의 회사 범위보다 높으니 더 낮게 가능하냐는 회사도 있었다.
그런데 당시 돈 한 푼 벌지 않는 백수였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회사는 어차피 최고의 인재를 가장 싼 값에 데려오려고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이 A, 회사가 원하는 것이 B일 때 내가 굳이 B를 맞추려 할 필요는 없다. 우선 협상을 시도해보고 내가 원하는 기준을 회사가 맞출 수 없다면 그냥 서로 갈 길 가면 되는 것이다.
그때는 그걸 몰랐다. 런던에는 참으로 회사도 많고 다양한 기회가 많아서 그렇게 해도 된다. 좀 더 기다리면 더 좋은 기회가 온다. 그런데 사람이 절박하고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없으면 싼값에 자신을 팔기가 쉽다. 그러면 결국 회사가 이득이 되는 것이다.
당시 첫 회사에서 받았던 연봉이 A라면, 내가 런던 현지 회사에서 쌓은 경험과 실력으로는 당연히 두 번째 회사에서는 A 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더 낮은 연봉에 Yes를 해버리면, 나는 나를 그만큼 대우해도 좋다는 것에 나 스스로 YES를 한 셈이 되는 것이다.
겸손한 것? 여기는 그런 거 없다. 내가 말하는 것이 내가 곧 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터무니없이 낮은 연봉을 부르면 HR 면접관이 "아, 지금 코로나로 취업상황이 안 좋아 많이 절박한가 보다. 우리가 알아서 연봉을 좀 올려서 데려와야겠다." 이런 거 없다. 차라리 여러 곳의 회사와 면접을 진행해서 "내가 다른 회사에서는 이만큼의 연봉 제안을 받았는데 너네 회사에서는 이 정도까지 가능하니"라고 압박을 넣는 게 더 잘 먹힌다. (물론 영국식으로 좀 더 부드럽고 정중하게 요청해야겠지만)
그때 당시에는 그걸 몰랐다.
내 기준을 내가 타협하면 고통받는 건 오로지 나일뿐이다. 내 행복은 오로지 나의 책임이다. 내 행복을 내가 지키지 못하면 남들은 발로 찬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당당히 밝히는데 남 눈치보거나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 내가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이라면 그것이 내게 중요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애도 그렇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남자 친구/여자 친구 사이가 되는 것인데 상대방은 캐주얼한 데이팅만 관심 있다면 몇 번 대화는 해볼 수 있겠으나 타협이 되지 않을 경우. 더 나은 미래와 나의 정신건강, 행복을 위해 서로 헤어질 줄 알아야 한다. 상대방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집, 직장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바꿀 수 있겠지.. 내가 노력하면 나아지겠지.." 물론 노력. 할 수 있다. 그런데 애초에 좋은 집, 좋은 직장을 갔으면 내가 굳이 하루하루 굳이 큰 힘들여 노력할 필요 없이 모든게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편안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럼 나의 매일매일의 행복도는 더 올라갈 것이다.
행복을 외주하려 하지 말자. 행복은 남이 알아서 챙겨주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왜? 내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는 법은 내 스스로가 제일 잘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