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투자회사에서 은행으로 이직한 과거 1년 돌아보기
비꼬는 말이 아니다. 정말로 그렇다. 코로나로 런던이 락다운(lockdown)에 들어간 작년 6월, 대학 졸업 후 제대로 된 나의 첫 직장이자 첫 영국 직장인 투자회사에서 인력감축 정리해고(redundancy)를 당했다. 지금은 벌써 1년이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디자인팀 전체 인원의 절반을 줄인다는 소식이 정해지고 다음날 많은 메시지를 받았다. 코로나로 인한 재택근무로 서로 얼굴을 마주한 적이 까마득한 상태였다. 나와 같이 일했던 QA tester는 "네가 지금 이 회사를 떠나게 된 게 정말 잘된 일이었다고 말하게 될 거야." "직업 안정성(job security)이 훨씬 더 높은 회사를 가게 될 거야."라고 말했다. 나보다 한 달 전에 잘렸던 다른 헤드급의 매니저는 "지금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힘들겠지만, 이 일이 너에게 많은 기회를 열어줄 거야."라 했다.
물론 당시의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있는 여유와 감정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나는 정말 진심으로 이 해고가 나에게 일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이란 것. 처음은 설레고 들뜨면서도 위험할 수도 있다. 첫 연애 당시에는 너무 좋았지만 헤어지고 시간이 흐른 후 옛 연인이 정말 별로였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듯, 첫 직장도 비슷하다. 연애를 하는 당시에는 이만큼 잘해주는 남자는 없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연애에서 벗어나고 나면 그만큼 잘해주는 것은 연인이라면 너무나 당연하며, 세상엔 더욱더 괜찮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나 또한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물론 자기 성찰과 자기 계발이 수반돼야 하겠지만)
그러나 연애를 하고 있으면 잘 모른다. 나와야 보인다.
나의 첫 직장을 돌이켜보면 사실 큰 단점은 없었다. 런던 시내 중심의 멋진 유리 건물, 사내 헬스장과 샤워실, 맛있는 구내식당과 직원들에게 1파운드로 제공되는 카페. 그 주변에 즐비한 펍. 매니저와 나는 주변 공원으로 산책을 갔고 오후 4시면 내 나이 또래의 동료들과 함께 맥주 한잔을 하는 것도 좋았다. 주니어 디자이너 치고는 괜찮은 월급을 줬고, 회사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다. 내 매니저는 사내 변호사의 도움으로 취업비자를 받았고, 그래서 나도 이 회사에서 취업비자를 받는 미래를 상상했고 그런 가능성도 실제로 논의했다.
내가 영국에 오래 산 경험 없이 바로 한국에서 영국으로 직장을 잡아서일까? 한국에서는 그 흔한 야근과 서로를 견제하는 경쟁적 일상이 반복되지 않는 점도 너무 좋았다. 오후 4시 반만 되면 나보다 먼저 퇴근하는 동료들이 인사 대신 너무 늦게 일하지 말라는 걱정의 말을 건넸고, 내 매니저는 내가 주말에 일을 하려 할 때마다 제발 하지 말라고 난리를 쳤다. 진정으로 나의 건강을 우려해서 나온 말들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직장에서 잘린 후 많은 것이 무서웠다.
이보다 더 좋은 직장을 갈 수 있을까? 나는 외국인에, 유학 경험도 없고 경력도 짧으며 취업비자도 필요한데. 같이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친구들이나 가족이 제한된 상황은 더더욱 나를 불안하게 했다. 게다가 코로나로 인해 영국인마저 직장에서 우수수 잘리고 임시휴직 (furlough)이 되는데, 내가 과연 재취업을 할 수 있을까?
혹시나 이러한 고민을 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나는 단연코 이 질문에 "네, 정말 그럴 수 있습니다. "고 말하고 싶다. 물론 재취업기간, 쉽지는 않다. 많은 눈물과 노력,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면서도 숱하게 받는 탈락과 재지원. 그러나, 그래도. 더 좋은 직장. 갈 수 있다.
현재 직장은 내가 원한 모든 것을 줬다. 따뜻하고 유능한 팀원, 더 높은 월급, 그럼에도 지켜지는 워라밸, 더 좋은 배움과 커리어 상승의 기회, 더 많은 결정권 (그로 인한 더 많은 미팅은 단점이지만..), 그리고 취업비자.
지난 직장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취업비자받기가 굉장히 어려운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 회사는 내가 시기에 맞춰 취업비자를 진행해야 한다고 말하자마자 바로 프로세스를 시작했다. 이걸 줄지 안 줄지 까다롭게 재거나 하지도 않았다. 면접에서부터 취업비자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취업비자 시기가 왔을 때 말을 바꾸지도 않았다.
취업비자를 진행하면 사측에서 1. 왜 다른 영국인이 아닌 이 사람에게 꼭 이 직업(role)을 줘야 하는지 서면 이유를 작성해야 하고 2. 5천 파운드 (한화 8백만 원) 가량의 돈을 회사에서 지불해야 한다. 당시 결정권자인 사내 디렉터는 나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5천 파운드를 바로 지불했다.
나는 취업이 어떻게 보면 연애와 꼭 닮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가치를 알아보지 않는 이들을 만나면 아무리 노력해도 뭔가가 잘 안된다. 나는 연애를 하고 싶은데, 아무리 노력해도 이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가 없다. 그러나 나의 가치를 잘 알아봐 주는 사람이라면, 내가 먼저 나서지 않아도 이쪽에서 먼저 연애를 하자고 제안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 취업이 되고 말고, 취업비자를 해주고 말고는 나의 노력도 어느 정도 중요하지만, 이미 내가 최선의 노력을 했다면 그다음부터는 나의 가치를 알아봐 줄 수 있는 회사의 안목 문제인 것이다.
(이건 사담이지만 내 지난 매니저도 1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게까지 좋은 매니저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매니저가 워낙 좋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자신은 취업비자를 받았음에도 내가 취업비자를 받으려 할 때 내가 요청한 도움과 조언을 무시했고 회사를 다니는 동안이나 해고가 일어난 후에도 말로만 언제든지 도와달라고 물을 뿐 나를 완전히 방치해뒀다. 참 애석하게도 그때는 그 사람이 바빠서 그런 거려니 문화가 달라서겠거니 이해하려 했지만 사실 영국이든 한국이든 본질적인 사람 사이 관계는 다 똑같고 내가 힘들거나 어려운 상황에서 원하는 것/도움을 요청할 때 그걸 무시하는 사람은 문화 차이가 아니라 그냥 그 사람의 문제인 거다.)
나의 가치는 회사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회사가 나의 가치를 알아볼 수 없다 해서 나의 본질적 가치가 평가절하되지 않는다.
잘린 게 뭐가 자랑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한국은 직업 안정성이 대체적으로 런던보다는 높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사내 횡령을 하거나 정말 큰 잘못을 하지 않는 이상 정직원을 자르는 경우는 흔치 않다. (물론 코로나로 인해 한국도 변수가 생겼지만..)
그러나, 흔치 않지만 분명히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이들의 아픔과 고통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내가 정리해고 이야기를 주변에 하고 다닌 후, 자신도 사실 그랬다며 개인 메시지로 공감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나는 이런 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양지로 꺼내놓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해고는 나의 능력과 나의 가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이해한다. 그렇기에 나는 나의 해고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 예전 직장에서 잘리고 현 직장 계약서에 사인하기까지 3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 3개월간 내가 능력면에서 엄청난 비약적 발전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성장은 기필코 시간이 걸린다. 서서히 이루어진다. 3개월 전의 직장이 없는 나와 3개월 후 직장을 가진 나는 똑같이 가치있는 존재다.
해고는 내가 더 나은 직장과 동료들, 나의 가능성과 가치를 진정으로 알아봐 주는 매니저를 만나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일이 없었으면 지금의 나도 없다. 물론 해고 없이 이직을 했으면 더 최고의 시나리오일수도 있겠다. 그러나 현 직장의 안락함과 편안함 때문에 더 절박하게 구직을 안했을 수도, 현 직장 업무나 스케줄 때문에 인터뷰 준비를 제대로 못했을 수도, 지금 들어갈 수 있었던 현직장의 구직공고를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물론 해고가 이루어진 회사의 방식이 정당하다거나 해고를 결정한 이들을 옹호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회사에서 나오면서 절차적으로 나도 개인적으로 상처 받은 부분들이 분명히 있고, 공감능력 없이 사람을 서류로 대하는 사이코패스 같은 사람들은 분명히 회사 내에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일어난 일을 바꿀 수 없지만, 우리의 생각과 앞으로 미래는 분명히 바꿀 수 있다. 과거 나를 잘랐던 디렉터는 나의 미래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현 직장에서의 미래가 꽤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