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곰비 Oct 22. 2021

엄마, 유학 안보내줘서 감사해요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시험 (입시미술/중학교 내신성적)을 쳐야 들어갈 수 있는 특성화 고등학교였고 기숙사제였다. 조금 특별한 학교 덕분에 모두가 국내 대학을 준비하는 일반 인문계고와는 달리 우리는 1학년 때부터 진로 고민을 시작해서 2, 3학년 정도가 되면 국내 입시준비반 / 유학준비반으로 이렇게 나뉘는 분위기였다. 


학사일정이 마무리되는 연말이 되면 미국, 일본 등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 졸업생들이 학교를 찾아와 간단한 강연과 질의응답 시간을 갖기도 했다. 그중에 단연 최고 인기는 미국 학교 재학생들이었는데 당시는 칼아츠 Cal Arts (California insitute of the Arts)가 가장 인기가 많았다. 졸업 후 그야말로 Dream Job인 Pixar 나 Disney로 취업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나는 미국 유학에 관심이 많아졌고 대략적인 유학비용을 찾아보니 평균 연 1억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나왔다. (이제는 이때보다 훨씬 더 비싸겠지..) 나는 기숙사에서 본가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조심스레 이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나. 아니 우리 가정형편을 알지만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원체 어릴 때부터 내가 원하는 것을 잘 표현하고 자라지 않았던 터라 나에게 있어서 유학 가능성을 물어보는 건 굉장히 큰 결심이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안돼. 우리는 그렇게 까지 해줄 수 없어. 우리도 우리 삶이 있는데 너 하나만을 위해 빚을 지고 온 가족이 힘들 수는 없어."



그냥 딱 잘라서. 이유도 묻지 않고 그냥 단 한마디로. 그렇게 나의 협상(?)은 단칼에 끝이 났다. 더 이상 묻지고 따지고 할 것도 없었다. 워낙 부모님이 완고했기 때문에.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은 우리 집에는 절대로 통하지 않는 말이었다. 


그 단호한 한마디에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집 가정 형편이 한 명을 위해 연 1억이라는 돈을 쓸 수가 없는 형편이었고 내 밑으로는 동생이 2명이나 있다. 애초에 우리 집은 사립대학교를 가는 것도 빠듯했다. 1n 년을 부모님과 자라오면서 내가 터득한 사실 하나는, 우리 엄마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건 그 어느 것도 없다는 것이다. 나 또한 정말 많은 세월을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엄마와 싸워도 봤고 타협도 해봤지만 그녀의 고집은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빠르게 마음을 먹었다. 


그럼 한국에서 최고의 대학을 가야겠다. 


나름 당시 내가 최고의 대학이라고 생각했던 미국의 대학을 못 간다면 그럼 한국에서 최고의 대학을 가야지. 그리고 국립대니까 등록금도 좀 싸지 않은가? 그렇게 입시를 시작했고 나는 유학을 가지 못했다. 




이제 영국 회사생활을 한 지 1년 반이 넘어 나의 고등학생 시절을 바라보는 지금. 나는 다시 묻고 싶다. 꼭 유학이 필요한가? 물론 내가 정말로 가고 싶은 학교가 있고 배우고 싶은 커리큘럼이 있고 순수한 학구열이 있다면, 가는 것이 분명히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 좋은 대학을 가는 이유가 "좋은 회사에 취업을 하기 위해서"라는 현실적인 이유를 고려할 때, 나는 유학을 안 가고도 스웨덴 회사에서 인턴도 했고 영국 회사에서 정규직으로 취업도 하고 취업비자도 받았다. 


내가 고등학교 때 미국 대학을 그렇게 열망했던 이유는 '유명한 미국의 회사'에 취업하고 싶어서였다. 아무래도 재학생/졸업생 네트워크는 강력한 무기이고 유학을 다니면서 그 나라의 문화를 배울 수도, 친구를 사귈 수도, 영어를 배우는 기회도 좀 더 생기니 말이다. 


그러나 대학교 3학년이 되어 본격적으로 해외취업에 관심이 있어 찾아본 여러 가지 방법들은, 유학비용이 없어도, 유학 안 가도 충분히 해외취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영국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여기 있는 외국인 직원 모두가 영국 또는 유럽 학위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걸 일상에서 겪으니까 이제는 이게 나한테는 되게 당연한데, 한국에서는 주로 유학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or 유학을 하고 해외에서 취업한 사례만 계속 접하게 되니까 사람들의 생각이 그렇게 굳혀지는 것 같다. 정보의 흐름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고 우물처럼 고여서 아예 다른 방법이 있다는 정보는 전혀 한국인들에게까지 닿지 않는다는 느낌이랄까?


나는 우선 유학을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돈도 없었기 때문에 우선 유학을 해서 취업한 사례들은 그냥 다 제꼈다. 그러다 보니 제3의 길, 제4의 길이 나왔다. 물론 주류는 아니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목마른 자가 우물 판다고 우물 파니 나오긴 나오더라. 

 

유학 경험 없이 취업을 해보고 나니까 그때 엄마가 딱 잘라서 "안돼"라고 말해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학이 해외취업의 유일한 문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모가 자식을 할 수 있는 한에서 지원해주는 건 바람직한 일이지만 부모도 부모의 삶이 있다. 자식과 부모는 결국 서로 다른 육체를 가진 타인이다. 부모가 빚을 내고 자신의 삶을 희생하면서 까지 자식을 지원해주는 것이 정말 부모와 자식에게도 좋은 일일까? (물론 집안 형편이 가능해서 유학비용을 지원해주는 경우는 제외) 




내가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한국문화는 부모가 자신의 삶을 포기하면서 자식을 뒷바라지하는 문화이다. 자식의 일거수일투족을 연예인 매니저처럼 관리하고 식단을 조절하고.. 물론 그렇게 탄생한 소수의 스포츠 스타/연예인들의 성공사례를 보고 부모들이 쫓아서 하는 경우가 정말 많지만, 근데.. 그것이 정말 자식을 위한 길인가? 이는 자식에게도 엄청난 큰 부담을 주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매달리면 자식이 부상을 당하거나, 마음이 바뀌거나, 피치 못한 사정으로 원래의 목표와 계획을 바꿔야 할 때, 쉬이 그리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온다. 말 그대로 "여기에 쏟아부은 돈( 시간 또는 정성)이 얼만데!!" 나는 내가 부모에게 빚을 안 지고 영국에서의 제2 인생을 시작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한다. 나는 부모님께 정말 1원 한 푼도 안 받고 영국으로 왔다. 인생에 공짜는 없다. 타인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는 만큼 나는 내 삶의 결정권을 어느 정도 양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정말 옛날 일이지만, 뉴욕에서 대학을 다니던 한국인 유학생과 친해진 적이 있었다. 정말 우연한 계기로 친해져서 나는 당시 한국에 있고 그 친구는 뉴욕에 있었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메시지를 받았다. 이 친구에게는 정말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가 있었다. 타지 생활의 외로움, 뉴욕 특유의 바쁨과 팍팍하고 경쟁적인 도시 분위기, 과도하게 쏟아지는 학교 과제에 대한 스트레스, 영어와 미국 문화 적응에 대한 어려움 등등.. 그러나 이 중 최고는 가족 문제였다. 


거의 빚을 내다시피 가족이 무리해서 이 친구를 유학을 보내주었는데, 그러다 보니 부모님들은 안 그래도 일하고 돈 벌기 바쁘고 피곤해 죽겠고. 이렇게 무리해서까지 보내주었으니 미국에서 잘 해냈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 그러니 이 친구가 힘들다고 하는 말들은 가족에게 징징거림으로 들릴 뿐 잘 공감되지가 않았다. 이들은 한시라도 유학비를 벌기 위해 일분일초가 아까운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해외생활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안다. 그래서 그 유학생 친구가 (지금은 연락이 끊겼지만)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있었을지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가늠이 된다. 그러나 이 친구는 가족에게 큰 경제적 빚을 지고 있고 가족들은 가족들 나름대로 유학비를 충당하기 위해 힘든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어느 누구의 탓이라고 할 수 없지만 모두가 상처를 받는, 이런 복잡한 상황. 나는 이것이 경계선 (boundary)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가족이라도 가능한 영역이 있고 가능하지 않은 영역이 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해 도와줄 수는 있지만 자신을 희생하고 포기하면서까지 타인을 위하는 것은, 결국 장기적인 관점에서 나는 독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The Selfish Gene)이다. 내가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인간의 행동과 생활양식을 정말 담백하고 단순한 원리로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국 자신의 이득을 최우선으로 놓을 수밖에 없으며 그 균형이 깨질 때에는 (내가 타인을 위해 과도히 희생한다는 느낌이 들 때는) 보상심리가 들 수밖에 없다. (이 말을 또 인간은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이 이기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다. 우리는 왜 가족과 연인에게 무조건적인 희생을 바라고 요구하고 그걸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감추는지? 아니, 가족과 연인도 인간이며 동물이다. 솔직하게 인정하자. 우리는 우리의 욕구를 최우선으로 해야 행복한 존재이며 타인도 그렇다는 것을. 누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있고 할 수 없는 영역이 있으며, 무한한 희생과 인내는 사실 그렇게 바람직하지도 않음을. 그리고 꼭 무조건적인 희생만이 아름다운 사랑인가? 자신의 바운더리를 지키고, 상대방의 바운더리를 지키면서 진정한 사랑을 할 수는 없는 걸까? 결국 우리 모두는 타인인데. 그런데 그걸 인정한다고 해서 내가 내 가족과 연인을 덜 사랑한다거나 하는 게 아닌데.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X까 라는 마음으로 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