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곰비 Dec 03. 2021

좋아하는 일을 하면 돈을 못벌거라는 생각

최근 아무 생각 없이 친구의 집에 놀러 갔다가 런던 웨스트엔드(West End)에서 일하는 한 뮤지컬 배우를 소개받게 되었다. 



내가 싱글이고 전 남자 친구와 헤어진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고 데이팅 앱을 2년 넘게 하지도 않고 남자랑 마지막으로 커피를 마신 지도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는 나의 말에 짜잔. 친구의 집에 우연히 있던 친구의 남자 친구 T는 자신의 연락처를 물색하더니 금세 자신과 같은 업계에서 일하는 친구 J를 소개해주었다. 둘이 잘 어울릴 것 같다며 깔깔거리며 박수를 쳐대는 친구와 T의 기대를 뒤로 하고, 어느새 일요일 아침 그 말로만 듣던 J와 나는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대놓고 Blind dating이라고 하진 않지만 이렇게 친구의 친구를 소개해주는 경우가 가끔 있긴 한 것 같다.)


J는 은근히 미남이 많은 것 같으면서도 없는 런던에서 참으로 키도 크고 훤칠하게 생긴 훈남이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본 뮤지컬 출연 경력이 좀 있는 편에 나는 J의 정보를 구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고 나와 전혀 다른 업계의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흥미롭고 설레기도 했다.


화려한 조명과 무대, 반짝거리는 의상과 환호하는 관객들, 그 속에서 주인공이 되는 환상적인 경험. 자유롭고 예술가적인 영혼을 가진 배우들. 그런데 생각보다 그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란 게 일반 사무직들보다 은근히 더 꽉 막히고 보수적인 경우가 있다.




내가 예술을 하니 남보다 더 '낫다'는 생각 


신념이 너무 강하면 부러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내가 예술 쪽 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오면서 이런 사람들을 심심찮게 봐왔다. 정통 예술의 길을 택한다는 것이 외롭고 배고픈 길이긴 하다. 특히나 연극, 뮤지컬 쪽 배우들은 현재 하고 있는 공연을 하면서도 다음 오디션을 계속해서 봐야 하고 특히나 이 업계는 코로나 타격이 굉장히 컸던 업계들 중 하나기도 하다. 먼 미래를 바라보기가 힘들고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수입을 갖기가 힘들다. (나는 지금 1%의 뮤지컬 스타들을 말하는 것이 아닌 99%의 일반 배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힘든 상황 속에서 "나는 내가 이렇게 힘든데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니 남들과는 고귀하고 달라."라는 이상한 신념을 개발시키는 사람들이 은근히 있다.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자신의 Ego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보면 살아남기 위해 생각이 그쪽으로 진화된 동물 같다.


무슨 일을 하냐는 J의 말에, 나는 대학교에 들어와서 디자인을 공부를 하다가, 그래픽 디자인, 모션 그래픽, 일러스트레이션, 다양한 진로를 살펴보다가 최종적으로 UXUI 디자인이 훨씬 더 기회도 많고 페이도 좀 더 좋은 것 같아 이 직업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J의 반응이.. 


"아... 그래~?"  하면서 내가 불쌍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이다. 


아니 왜? 그게 어때서?


속으로 많은 의문이 들었지만 우선 다음 대화로 넘어갔고 J는 계속 내 직업에 대해 끊임없이 물어보기 시작했다. "계속 이 직업을 평생 하고 싶냐"는 J의 질문에 "음 나는 당연히 언젠가 은퇴할 나이가 있으니까 은퇴할 때까지만 하지 않을까 싶고, 은퇴 이후에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을 언젠가 만들고 싶다."라고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J는 의심쩍은 표정으로 


(J) "근데 그걸 왜 지금 안 해?" 


이걸 읽는 독자들이 여기서 이상한 점을 눈치챘는지 싶다. 잉? 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일시적인 거고 내가 좋아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내가 현재 직업을 선택할 때에는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했고 그중에 '페이'가 고려된 것은 당연히 맞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하고 있는 직업이 내가 원치 않는 직업을 억지로 하고 있는 건 아닌데? 의문이 들었다. 


(나) "응? 그냥 지금 안 하고 싶으니까!" 


(J) "너 지금 회사 다니면서 짬 내면서도 할 수 있잖아. 근데 그걸 왜 지금 안 하는데?"


(나) "아니 그건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게 아니라니까? (이걸 내가 왜 정당화시켜야 하는지 굉장히 당황스러움)"


아니 지금 안 하고 싶다고요. 내가 지금 원하는 직업의 경제적 측면에 만족한다고 해서 내가 지금 원치 않는 직업을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고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직업이 싫었으면 내가 왜 2년간 커리어 고민에 관해 글을 쓰는 블로그를 하고 왜 내가 회사 끝나고 따로 UX 스터디 그룹 모임을 하고 UX 컨퍼런스를 가고 혼자 공부하고 책 읽고 그러는데? 잘하고 싶고 좋아하니까 그런 거 아닌가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내 휴식시간에도 내 직업을 잘하기 위한 공부를 자율적으로 하는 거 아닌가요? 




꼭 돈을 못 벌어야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건가요? 


크리에이티브 업계는 "너는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일을 좀 공짜로 해줘라."라는 생각이 만연하지 않은가? 런던 그래픽 디자인 쪽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넘치는 무급 인턴십에, 인턴에 또 다른 인턴, 그리고 또 인턴을 계속 해가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아, 나는 지금 경력직이 아닌 주니어를 말하는 것이다. 주니어는 어느 직종에 가나 다 그렇다고? 그래, 어느 정도 그런 면은 있지만 그 정도가 심한 업계가 있다. 페이는 말도 안 되게 적고 정규직을 매번 줄 것처럼 말하면서 인턴들의 재능과 노동력을 갈취한다. 그러나 이런 타락이 너무 팽배한 나머지 그 속에 일하고 있는 이들도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 몸과 마음이 굉장히 힘들고 경제적으로 힘들어야만 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자기도 모르게 내재화하는 것 같다. 


내가 정말 그래픽 디자인이 아니면 안 돼! 일러스트레이션이 아니면 안 돼!라는 생각을 가진 이였으면 모를까, 그것도 어떻게 보면 내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지만. 나는 지금 내가 일하는 UXUI 디자인 자체에 굉장히 만족하는 편이다. 


우선 디지털 프로덕트 디자인은 예술이 아니다. 디자인을 아직도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될 준비가 안 돼있다. UXUI는 자신의 개인적인 예술 세계를 펼치는 곳이 아니다. 당신의 디자인을 결정하는 것은 테스팅이고 유저고 데이터와 자료들이다. 나는 UXUI가 객관적이라는 점이 참으로 좋다. 돈이 없고 배경이 없는 이들도 누구나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될 수 있고 내 능력을 객관적인 자료로 증명한다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 내가 말이 많고 목소리가 커서 내 디자인이 선택되는 게 아니라, 객관적인 제삼자가 내 디자인이 좀 더 쓰게 편하고 좋다고 말해줘서 내 디자인이 선택되는 것이다. 


그런 곳이 바로 IT업계다. 인도인들이 왜 IT 업계에 그렇게 뛰어들고 실리콘밸리의 유명 기업들의 CEO가 되고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는가? 이 업계만큼은 빽도 인맥도 아니고 실력으로 증명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나도 아주 잠깐, 고등학생 때 서양화 전공을 선택할지 고민한 적이 있다. 그리고 잘 나가는 한국 서양화가 작가 리스트를 뽑아 쭉 검색해서 이력을 쫙 훑어봤는데, 죄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유학파들이 많았고 첫 전시를 본인이 갤러리를 전체 대관해서 하거나 부모님이 직접 작품을 다 완판 시키는 등.. 솔직히 말하면 좀 실망했다. 왜? 나는 유학을 갈 돈이 없었으니까 어떻게 내 미래를 그려야 할지 막막했다. 그런데 IT 업계는 유학 없이 취업을 해서 해외에 살고 있는 이들이 좀 있더라. 물론 정통 예술 업계 중에서도 정말 경제적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와중에 성공하는 이들,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고귀한 예술업계들 중에 정말로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지만 능력만으로 인정받아 빛나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 사회적, 시스템적으로 어떤 제도가 마련돼있는지? 더 이상 뼈를 깎는 고통에 정신질환을 겪고 끝도 없이 배고파봐야 "예술가"인 것, 이거 좀 비인간적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우리가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기본적인 욕구 충족을 해야 한다는 거 좀 인정했으면 좋겠다. 예술가들의 불행한 인생을 불행 포르노처럼 쓰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 말이다. 




돈이 진짜 없어본 이들만이 돈이 없을 때 사람/사회가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안다. 


나는 내가 진짜 돈이 없어 봤을 때 사회가 얼마나 잔인해지고 사람으로 인해 얼마나 다칠 수 있는지 직접 겪어봤기 때문에, "돈이 없어도 지금 내일 당장 낼 월세가 없어도, 좋아하는 걸 한다면 행복할 수 있어요!" 따위의 거짓말은 못하겠다. 매슬로우의 욕구 피라미드를 봤는가? 우선 내가 지금 당장 배고픈 것부터 해결해야 우리는 자아실현의 욕구를 실현할 수 있다. 나는 대학생 초반 때, "가슴이 뛰는 일을 하세요! 지금 월급은 중요한 게 아니에요." 하면서 크리에이티브 업계의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월급 행태를 모른 척하고 해결하지 않는 윗 세대들이 너무 싫었다. 아니, 저 임금을 받으면 제가 제 월세를 못 낸다고요. 당신이 그 주니어의 월급을 결정하는 자리에 있는 시니어가 아닌가요? 그리고 알고 보면 그 사람은 집에 좀 경제적으로 부유했고, 그런 패턴들. 


자신이 정말 좋다고 하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 오히려 그것 때문에 역설적으로 부모님의 손을 더 빌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나이가 서른이 넘어서까지 부모님의 경제적 도움을 받으면서, 나는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언젠가는 성공할 것이라고 자위하는 것에 어떤 고귀한 의미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내가 선택한 결정들의 장단점을 이해하고 그 단점까지 고스란히 껴안는 것이다. 모든 선택에는 그에 따르는 기회비용을 무조건 치르게 되어있다. 


누군가는 먹고살려고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원하지 않지만 억지로 지금 직업을 꾸역꾸역 하고 있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직업활동은 고귀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불법적으로 상대방의 돈을 갈취하거나 비윤리적인 방법으로 돈을 벌고 있지 않는 이상. 당신이 매일 원치 않는 몸을 이끌고 일어나 하루 정해진 할당량의 일을 하는 것은 굉장히 고귀한 일이고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영원히 계속되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언젠가 내가 원하는 경제적 자금이 어느 정도 모였을 때, 내가 진짜 원하는 일을 할 수도 있는 것이고.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왜 우리는 9-5의 사무직을 참으로 지루하고 고루하다며 왜 이리도 싫어하는지. 다들 묵묵히 그 자리에서 자신이 맡은 일들의 책임을 지는 사람들 아닌가. 우리 이런 사람들을 좀 더 인정해주고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이런 평범한 이들이 다 우리 친구들이고 가족들 아닌가. 


 



작가의 이전글 엄마, 유학 안보내줘서 감사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