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국에 온 이유를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개인으로 살고 싶어서'이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내게 왜 영국에 와서 살고 있냐고 물을 때 나는 항상 커리어적인 이유를 말하곤 했다. 프로덕 디자이너를 단순히 포토샵 기술자로만 생각하는 한국의 인식, 낮은 급여와 끊임없는 야근. 이중의 으뜸은 단연 워라밸 (work & life balance)이었다.
워라밸의 본질은 무조건 일을 적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바로 '자율성'이다. 내가 일을 많이 하고 싶지 않은데도 일을 해야 할 때, 내가 일한 것에 대한 합당한 보상이 없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주체성이 결여된 거대한 기계 속 톱니바퀴처럼 느낀다. 영국에서도 투자은행이나 대형 로펌에서 일하는 이들은 한국보다 정말 더 많은 시간을 일한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이 그렇게 하고 싶어서 선택한 것에 더 가깝다. 영국에서 정말 드물지만 워커홀릭이 있긴하고 그렇게 살고 싶은 이들은 확실한 보상 체제가 있는 시스템 안에서 그렇게 사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워커홀릭이 아니더라도 그런 삶을 선택하지 않을 자유가 없다.
한국에서 워라밸을 맞춰 줄 수 있는 회사가 있다면 굳이 다른 나라에 힘들게 이민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 졸업 후 한국에서의 일자리를 먼저 찾았다. 그러나 한국 회사들은 워라밸과 월급이 반 비례하는 구조였다. 스톡홀름에서 첫 디자인 인턴을 경험한 내가, 내 기준에 생각하는 워라밸을 맞추려면 내가 생각하는 월급의 반은 깎여야 했다.
영국에 와서 어떻게 보면 제3자의 시선으로 한국을 바라보게 되는 기이한 경험들을 하곤 한다. 한국은 참으로 뭐든 묶어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한국인이라면, 한국사람이라면 당연히'라는 표현들을 자주 한다. 영국인들도 영국인들만의 문화나 특징이 있긴 하지만 여긴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영국인이라는 국적 정체성보다 더 강하다. 워낙 다인종과 다문화가 섞여 살고 있는 나라여서 그런 것 같다.
한국인이라고 하면 가장 대표적으로 생각하는 것의 으뜸은, 맵고 짠 음식을 좋아할 것이라는 편견.
한국은 같은 음식을 여러 명이 나눠 먹는 쉐어 문화가 강하다. 보통 감자탕, 부대찌개, 삼겹살 이런 것들은 개개인으로 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고 큰 냄비에 나온 음식을 여러 명이 나눠먹는다. 이런 문화에서는 개개인의 고유한 선택을 존중받기가 힘들다.
어릴 적 나는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엄마 밑에서 항상 매운 음식을 먹고 자랐다. 어린 나이 때는 당연히 매운 음식이 힘들 수밖에 없지만 가족이 하나의 음식을 공유하는 문화에서 그것 말고는 먹을 수 있는 대안이 없었다. 매운 음식이 먹기 힘들다고 해도 내 개개인의 고유한 취향과 선택이 존중받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영국 친구들 중에서는 부모님이 육식을 하더라도 자식이 채식을 하고 싶다고 하면 항상 본인만을 위한 채식 메뉴를 만들어 주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들을 듣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꾸역꾸역 매운 음식을 먹었고 나이를 들어가면서 친구들과의 술자리나 밥을 먹을 때도, 각자 먹을 것을 하나만 시키는 것이 아닌 여러 명과 나눠먹는 문화 때문에 항상 맵고 짠 안주를 시키게 되었고 그렇게 나는 보통의 한국인처럼 매운 음식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영국에서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누구의 강요나 압박 없이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요리해 먹고 사 먹을 수 있고, 식당에 가거나 회사 점심시간에도 셰어보다는 각자 먹고 싶은 요리를 시켜 먹는 문화에 익숙해지면서 느낀 사실은, 나는 매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평소 내가 하는 요리들은 맵지 않은 음식이 대부분이었고 가끔 아시안음식이 그리워서 먹을 때가 있지만 그마저도 맵지 않은 일식이 대부분이었다.
런던에 사는 여성 한국인 디자이너 모임에 나갔다가 정말 오랜만에 핫팟을 먹었다. 일반 한국인에게는 전혀 맵다고 느껴지지 않을 맛이었는데도 세상에, 먹고 나니까 배가 너무 아픈 것이다. 생각해 보니 내가 매운 음식을 먹은 지도 거의 6개월이 넘게 지난 것이다. 그 일례로 내가 오랜만에 한국을 가면 한국 음식이 먹고 싶어서 잔뜩 먹고 항상 그다음 날, 다다음 날에도 배가 아픈 경험을 하곤 한다. 나는 매운 음식을 먹어도 되지 않을 자유가 있는 환경에서는 매운 음식을 정말 먹지 않기에, 조금만 매운 걸 먹어도 배가 아파오게 되는 것이다.
나는 대학생 때 홀로 유럽여행을 했을 때도 캐리어에 한국음식을 챙겨가는 사람이 아니었고, 현지 음식도 입맛에 잘 맞았으며 굳이 유럽여행에서 한국 식당을 찾아가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그렇게 한국음식을 찾아 먹거나 집에서 요리해먹지는 않는 편이다. 요즘 런던에서도 원하면 언제든지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기도 하지만, 나는 한식을 해 먹지 않으면 삶이 너무 힘든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에 와서도 한식이 그리워서 힘든 적이 거의 없었고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도 영국 생활에 만족하며 잘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트밀크에 샷은 하나만 주시고요, 바닐라 시럽은 슈가프리 있나요? 그걸로 한 펌프만 해서 주세요. 앗, 그리고 온도는 너무 뜨겁지 않게 해 주시고요."
영국에서 처음으로 카페 알바를 할 때 나는 머리가 터져버리는 줄 알았다. 6명이 오면 6명 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는 한국에서, 여기는 6명이 오면 6명 다 각자 커스텀 메뉴를 시켜 먹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꼭 스타벅스가 아니더라도!) 이런 시스템은 효율적이지 않다. 당연히 시간이 오래 걸리고 주문받기도 불편하다. 하지만 영국이나 미국 같은 서양문화는 커스텀해서 먹을 수 있는 옵션이 많고, 비건, 베지터리언이나 알레르기 같은 각자의 요구사항이 워낙 다양하다.
한국의 메뉴는 그냥 아이스 아메리카노면 아이스 아메리카노인 것이고 라테면 라테인 것이다. 그렇기에 굉장히 효율적이다. 생각해 보면 큰 냄비에 요리를 하나만 하면 요리를 하는 입장에서는 요리하기도, 치우기도 편하다. 그러나 이런 효율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개개인의 요구나 개성이 존중받기 힘들다. 다수의 편리를 위해 소수가 자신의 개성이나 욕구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국에 오면 한국인이 느끼기에 뭐든 시간이 오래 걸리고, 불편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불편한 시스템이 있기에, 영국에서의 사람들은 개개인으로서의 특성을 존중받고 자라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걸 이해받고 자란 사람들은 그걸 타인에게도 당당히 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효율적이고 빠르지만 개인이 무시당하는 시스템보다는 나 개인의 고유성과 유일함을 유지하면서도 불편한 시스템을 선택했다. 영국사회가 내게 완벽한 사회는 아니지만 그건 내가 참을 수 있고 견딜 수 있는 단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