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마스터 Jun 12. 2020

건축학개론

잊고있던 나의, 혹은 당신의 이야기

 사실 이 것은 영화와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자신이 이제 어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것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앳된 모습이 얼굴에 남아있는 소년은 아직은 유치하고 바보 같은, 찌질한 아이에 불과했다.

세상이 다 내 것 같았다.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면 구름을 움켜질 수 있고, 두 발을 움직여 있는 힘껏 달리면 이 세상의 끝 어디라도 금방 닿을 것 같았다. 자기 자신을 혹독하게 몰아세울 수 밖에 없었던 컴컴했던 수험생시절을 무사히 끝낸 그 소년은 해방감과 자신감에 한없이 들떠 있었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충만한 행복에 늘 기분 좋은 꿈을 꾸곤 했다.


 그 해 봄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어느 해나 봄은 아름답지만 그 해의 봄은 그 전해보다, 그 전전해보다 적어도 한 뼘 정도는 더 아름답지 않았을까, 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푸르른 4월의 캠퍼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금잔디는 새로 돋아나는 풀잎의 싱그러운 내음이 늘 가득했다.햇살과 이슬을 머금은 꽃은 이제 막 봉우리를 열기 시작하고 있었고, 친구들의 웃음소리는 새들의 지저귐처럼 끊이지 않았다. 대학생활은 소년의 기대보다도 훨씬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봄의 따사로운 태양이 대지 구석구석 그 햇살을 비추던 어느 날, 소년은 소녀를 보았다. 점심식사 이후의 나른한 공기가 둘러싸고 있는 학교 앞 작은 카페 유리창 너머로 소녀를 본 순간 소년의 인생은 조금 달라져 지금까지와는 다른 궤도를 걷게 되었다.


 소년은 소녀를 마냥 따라다녔다. 소녀를 따라 무엇을 하는 지도 모른채 동아리에 다니게 되었고, 무슨 과목인지도 모른채 알아보기 힘든 불어가 적혀있는 교과서를 들고 인문대를 기웃거려야 했다. 우연을 가장하고 소녀를 만나기 위해 매일 밤 머리를 굴렸고, 소녀가 있는 곳에 함께 하기 위한 방법을 착기위해 순간순간 골몰히 생각에 잠기곤 했다. 혼자서 말도 안되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히죽거리기도 하고, 왠지 소년과 소녀가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다지 매력적일 것도 없는 외모를 돋보이게 하고 싶은 마음에 10여년을 다니던 단골이발소를 끊고 미용실을 다니기도 하고, 어울리지도 않는 향수를 뿌리기도 해보았다. 그렇게 소년은 경험해보지 않았던 일들을 겪어나가며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소녀의 곁을 맴돌기만할 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고 있었다. 애써 만든 친구사이가  다칠까 두려울 때도 있었다. 늘 자신감에 넘치고 늘 밝은 웃음을 짓던 소년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별다를 것 없는 소녀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기뻐하고 상처받는 일이 많아졌다. 이런 저런 잡념이 떠올라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슬픈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냥 혼자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어떤 날은 아무 이유없이 기분이 좋아 실컷 웃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괜시리 울적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베갯닛을 적시기도 했다. 친구들을 만나도 마냥 즐겁지 않았다. 즐겁던 모임은 어느새 짝사랑의 괴로움을 달래는 술자리로 바뀌게되 었고 언제인가부터 소년의 모든 대화는 그 소녀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되고 있었다.


 소년보다 딱히 다를 것도 없고 더 많이 알 것도 없는 친구들과 며칠을 고민했고, 수십 가지 방법을 놓고 갈등했다. 결국 소년은 소녀의 집 앞에 찾아갔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소녀의 앞에서 소년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긴장했고, 예상과는 다른 소녀의 대답과 행동에 너무나 당황했다. 심장에서 전해지는 파동이 느껴질 정도로 뛰는 가슴을 움켜진 채로, 소년은 결국 얼굴이 빨개진 채 도망치듯 그 곳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소년은 서울역 승강장 한복판에서 자리에 주저앉았고 그 곳에서 한 시간을 울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친구를 보고 또 한 시간을 울었다. 고통은 쉬이 잊혀지지 않았고, 봄은 더 이상 따뜻하지도, 찬란하지도 않았다. 소년에게 술과 담배는 더 이상 쓰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그 시절 사랑에 빠지지 않았던 이가 있었을까. 그 눈부시게 빛나던 청춘의 마음에 들어온 소녀 한명 없는 이가 있었을까. 그러나 온 세상이 소년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던 그 때는 소년의 아픔만이 세상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고 착각했다. 캠퍼스가 사랑으로 충만해져가고 있었지만 그 계절, 소년의 자리는 없었다. 모든 슬픔은 다 소년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소년은 이런 환희와 고통의 과정속에 아이에서 어른으로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 갔다. 영원할 것만 같던 고통은 줄어들어 갔고, 소녀가 없는 일상에 익숙해지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어갈 수록 소녀를 머리속에 떠올리는 시간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애써 떠올리지 않으면 생각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소년은 어느새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어른이 되었다.


 소년은 이제 더 이상 유치하고 소심한 아이가 아니었다. 어엿한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한 그는 이제 옛 추억따위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 것처럼 살아간다. 어른이 된 그는 이제 그 시절의 소년처럼 더 이상 유치하지 않지만 그 대신 순수함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그는 꽤 많은 돈을 벌게 되었지만 그 대신 한없이 찬란할 것 같던 그 청춘에서 반 걸음정도 벗어나게 되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인격이라 부르는 자의식의 성찰을 이루었지만 그 대신 봄 날 오후의 광휘와 같은 환한 미소를 더 이상 지을 수 없고, 어떤 슬픔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되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어른이 된 소년은 어느 날 우연히 극장에 들러 영화를 보게 된다. 영화를 보고 나온 그는 밖으로 나간다. 아직 날씨가 많이 춥다. 올 겨울들어 유난히 황량한 날씨는 순식간에 그를 싸늘하게 둘러싼다.

그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그리고 다시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숨을 들이마시면 싱그러운 봄의 내음이 콧속으로 살며시 들어온다. 그리고는 천천히 눈을 뜬다. 순간 겨울은 사라지고 그의 눈 앞에는 1999년 4월 어느 봄날 오후의 캠퍼스가 펼쳐진다. 그는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 어느새 그는 다시 소년이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답답한 정장과 서류가방은 사라지고, 청바지에 티셔츠, 큰 가방을 매고 교정에 서있는 소년을 본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그리고 그의 몸을 감싸는 따스한 바람을 느낀다. 나른함을 느끼자 기분이 좋아진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면 평화로운 캠퍼스의 금잔디가 내게 손짓한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교정을 걸어나간다. 어느새 나타난 친구들이 소년과 함께 걷기 시작한다. 별다른 것도 없는 이야기에 왁자지껄 웃으며.

그리고 소년의 눈에 들어오는 한 소녀. 긴 생머리에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금잔디에 앉아 하늘을 보고 있던 소녀가 보인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던 소녀는 이윽고 소년과 눈이 마주치게 되고, 소녀는 봄의 요정이 대지를 향해 미소 짓는 것처럼 소년을 향해 환하게 미소 짓는다.소년도 이제서야 비로소 소녀를 향해 미소 짓는다.


 그렇다. 이 이야기는 모두 나의 이야기다. 영화 감상평을 쓰겠다고 해놓고 나의 옛 이야기를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이유는 단순하다. 영화 “건축학개론”을 보고 밖에 나와서 잠시 눈을 감고 서있었을 때 잊고 있던 이 추억이 ‘삭’하고 눈앞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싱그러운, 하지만 그래서 더 아련한 젊은 날의 추억이 있다면 “건축학개론”을 한 번쯤 다시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지만, 당신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 포기는 미련 없이, 망각은 빠르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