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마케터의 고백 > 좋은 마케터가 될 준비하기 (1)
어떻게 하면 좋은 마케터가 될 수 있을까? 최신의 마케팅 이론을 공부하고 지식으로 무장하는 것. 많은 경험을 쌓고 노하우를 만들어가는 것. 소비자와 시장을 이해할 수 있는 천부적인 감각을 타고나는 것. 모두 맞는 말이다. 지식과 능력에 경험까지 더해지면 좋은 마케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물론 그렇게 되기 위해 매일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솔직히 매일은 아니...) 그런데 그보다 먼저 좋은 마케터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세상과 본인의 일, 그리고 조직을 바라보는 태도의 문제가 더 근본적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태도를 가졌다고 모두가 좋은 마케터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지금까지 경험하며 만난 좋은 마케터들은 모두 좋은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어떠한 태도냐고? 그것은 바로 포기와 망각이라는 직장생활 궁극의 기술이다.
난 포기와 망각이야말로 진정한 긍정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본다. 실패와 좌절의 상황 앞에서 억지로 “긍정적으로 생각해” 따위의 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쉽게 손에서 놓아버리고, 빨리 잊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이런 자세야 말로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마케터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나는 운이 좋게도 국내 최고의 크리에이티브 팀들과 일할 경험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기대보다 성과가 좋지 않았던 팀과도 일한 경험도 있다. 그런데 옆에서 지켜본 바에 의하면 그 두 가지 종류의 팀들을 나누는 것은 지식도, 능력도, 경험도, 감각도 아닌 바로 태도였다
하나의 팀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오랜 기간 회의와 고민을 거듭한다. 온갖 리서치 데이터, 그리고 비싼 돈을 주고 구입한 빅데이터들을 놓고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소비자 인사이트를 헤아리고 전달할 메시지를 찾는 과정은 진부한 표현이지만 백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은 고통스러운 과정을 수반한다. 소비자의 눈높이는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고 시장 트렌드는 따라잡기 버거울 정도로 빠르게 변한다. 새로운 제품이 매일 등장했다 매일 사라진다. 전에 없던 유행이 삽시간에 퍼지기도 하고, 30대 후반의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소재들이 이슈가 되곤 한다. 이 상황에서 혁신적인 제품이나 광고를 구상하고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어 내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좋은 아이디어가 발굴되고, 이를 발전시키고 소비자의 삶에 전파할 세세한 계획이 수립된다. 그리고 이를 클라이언트에게 제안할 P.T가 준비되고 드디어 대망의 발표시간이 다가왔다. 오랫동안 준비한 프로젝트를 발표하는 순간은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내게도 설레고 긴장되는 순간이다. 기대한 대로 훌륭한 P.T가 끝나고 클라이언트의 피드백을 기다린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이 멋진 아이디어에 대한 클라이언트의 피드백은 아주 간단하고 짧을 때가 많다. 그것도 ‘거절’이라는 결과물과 함께 올 때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내가 만난 최고의 팀이 보인 반응은 실로 의외였다. 매우 담담히, 그러나 유쾌함을 잃지 않는 태도로 거절을 받아들였다. 그 팀의 리더였던 CD(Creative Director)에게 어떻게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고, 화가 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쿨하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이게 우리의 일이에요, {제안이 거부되었다→다시 다른 제안을 준비한다} 이 두 문장의 반복이지요. 화를 내거나 허탈해할 시간이 어디 있나요? 다른 일도 마찬가지겠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는 시간이 가장 소중하거든요. 감정을 무의미하게 쏟아낼 시간에 다른 길을 찾는 것. 그게 바로 프로페셔널이라고 생각해요”
초짜 마케터였던 나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했다. 야심 차게 준비한 제안이 실패한다. 최고의 효율을 위해 바로 다음 제안을 준비한다. 이런 간단한 과정을 반복적으로 거치는 것. 그것도 수없이 많이. 위의 두 문장 안에는 쉽게 포기하고 빨리 잊어버리는 마케터의 태도가 들어가 있고, 이 것은 곧 긍정적인 태도로 다시 도전할 수 있게 해 주는 원동력이 된다. 납득하기 어려운 클라이언트의 피드백에 분노하고 실망한다고 바뀌는 것은 없다. 오히려 아까운 시간만 날아간다. 차라리 그 시간에 담담하게 다음 제안을 준비하는 것이 모든 면에서 효율적이다.
그들에게서 배울 수 있었던 두 번째 교훈은 몰입에 대한 태도였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 틀어박혀 토론하고 머리를 쥐어짜고 고민하는 것. 잘 때도, 밥 먹을 때도, 퇴근 후에도 내가 맡은 일에 몰두하고 더 좋은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것. 보통 실력이나 경험에 비해 열정이 과도하게 끓고 있는 신입 마케터들이 하는 실수다. 몰입은 적절한 수준을 찾을 때 비로소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지나치게 어떤 일에 몰두하면 주변이 보이지 않는다. 주변을 보지 못하면 예상외의 변수, 한발 떨어져 있는 객관적인 사람들의 의견,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프로젝트의 모습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된다. 오로지 내 눈앞의 과제에만 과도하게 집중하면 멀리 볼 수가 없다.
마케팅이라는 일은 내 제품과 경쟁 제품, 소비자와 시장이라는 큰 그림을 머릿속에 항상 염두에 두지 않으면 ‘좋은 기획에서 태어난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제품’이 되기 쉽다. 방향성을 잘 잡은 좋은 기획도 진행되어가는 단계에서 각도가 조금만 틀어져도 결과물은 몇 광년이나 틀어지기 십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케터들은 당장의 내 발끝이 아니라, 고개를 들어 먼 길을 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몰입은 금물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배운 세 번째 교훈은 조급해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 조급증을 참는 정도가 아니라 "이래도 되나"싶을 정도로 느긋해지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데드라인이 다가올수록,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수록 마음은 급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마음이 급해지면 우리는 일에 더 열중을 하는 것이 아니라 "큰일 났네, 시간이 점점 줄고 있어!"라던가 "오 마이 갓, 팀장이 날 살해하려 할 거야"따위의 걱정을 하는데 시간을 쓰게 된다. 그러면 일을 할 시간은 그만큼 줄어들고, 그만큼 데드라인은 빨리 다가오게 된다.
내가 만난 한 카피라이터는 좋은 아이디어가 도저히 나오지 않는 순간이 되면 그다음 날 짐을 싸서 2-3일간 휴가를 떠나는 용감한 사람이었다. 세상에나, 일분일초가 급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휴가를 가다니! 그러나 그는 태연한 듯 떠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돌아왔다. 그리고는 얼마 남지 않은 데드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제출하고는 했다. 그에게 왜 휴가를 가는지, 가서 무엇을 하는지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
"데드라인이 다가오고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면 점점 절벽 끝에 내몰리는 기분이 들어요, 그 지경이 되면 일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어지죠, 오로지 절벽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걱정만 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절벽 끝이라는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해변가로 떠나는 거예요. 저 스스로도 미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일단 해변에 가서 선베드에 누워 맥주를 한 잔 마시면 조급함이 사라지거든요."
세상 모든 일은 그것을 바라보는 내 태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세상은 그리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나 내가 내 태도를 바꾸면 내가 바라보는 세상이 바뀐다. 실제 세상은 바뀌지 않지만 어차피 세계는 상대적인 것이다. 내 눈에 보이는, 내 머리로 인식되는 세상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그거면 되는 것 아닌가?
긍정은 가지면 좋은 옵션이 아니다. 마케터로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 역량이다. 그리고 긍정은 억지로 좋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빨리 털어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적당히 몰입하고 적당히 느긋해질 것.이라는 삶의 방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