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마케터의 고백
마케팅이란 무엇일까? 어떤 사람에게는 스마트폰 속에서 만나게 되는 광고나 길에서 보게 되는 간판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동네 마트에서 물건을 구입할 때 끼워주는 판촉물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나 같은 사람에게는 업으로 삼고 있는 일이자, 동경하고 잘하고 싶은 일,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별 관심 없는 그냥 그런 것.
이렇게 마케팅이라는 단어는 누구에게나 다르게 받아들여지지만, 이 단어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살면서 수없이 많이 듣고 보고 경험하게 되는 친숙한 단어. 그러나 그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는 아는 사람이 잘 없고, 특별히 그 의미를 궁금해하는 사람도 잘 없을 것 같은 마케팅이라는 일. 이 일이 무엇인지 파악해보는 것이 이 글의 출발지가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먼저 미국 마케팅 협회가 정의한 마케팅에 대해 살펴보자.
Definition of Marketing : American Marketing Association
Marketing is the activity, set of institutions, and processes for creating, communicating, delivering, and exchanging offerings that have value for customers, clients, partners, and society at large. (Approved July 2013)
(URL : https://www.ama.org/the-definition-of-marketing/)
이 말을 직역해보면
‘소비자, 고객, 파트너, 사회 전체를 위한 가치를 제공하기 위한 창조, 소통, 전달, 교환의 활동, 제도 및 절차’
정도로 바꿔볼 수 있겠다. 감이 오는가? 감이 잘 오지 않는다면 이 정의가 다소 포괄적인 마케팅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경영학이나 마케팅학을 전공하지 않았다면 좀 헷갈릴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마케팅을 어떤 “목적”을 두고 이루어지는 “활동”으로 규정지어보자. 이때 마케팅이라는 개념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마케팅은 제품, 시장, 판매촉진, 판매의 네 가지 단계로 나뉜 활동으로 볼 수 있다.
제품은 신제품(재화, 서비스)의 개발, 기존 제품의 개선 및 새로운 용도의 개발, 제품 포장과 디자인, 수명을 다한 제품의 운영 종료 등이 있을 수 있다. 시장은 시장조사, 수요예측, 판매채널 관리 및 유통(배송, 진열 등), 가격, 경쟁에 관한 것이며, 판매촉진은 광고, 선전, 각종 판촉활동을 말한다. 판매는 소비자와의 접점에서 이루어지는 판매활동, 판매원 관리 및 유관된 업무를 말한다.
그리고 이 네 가지 활동 전반에 함께 이루어지는 계획과 정책 설정, 조직관리, 예산관리까지 포함한 활동을 마케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마케팅은 특정 직군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제품 생애 주기(Product Life Cycle)의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이라는 개념이 더욱 적절하다. 그 큰 개념 안에 제품 연구원, 광고홍보 종사자, 브랜드 매니저, 고객 관리 담당자, 영업사원까지 여러 가지 직군이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에 관련한 모든 활동이라는 말로 압축해서 표현할 수 있겠다. 사실 그렇다. 마케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정 조직, 기업, 기관, 단체, 개인이 다른 대상의 인식을 변화시키고 행동을 유도하기 위한 모든 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연구개발(R&D), 제품 전략 기획 및 실행, 광고, 홍보와 판촉, 영업과 고객 관리까지 제품의 생애와 관련된 모든 것을 마케팅이라는 넓은 개념에 넣을 수 있다. 이제 미국 마케팅 협회가 정의 내린 마케팅이란 무엇인가가 좀 더 쉽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마케팅을 브랜딩과 제품 디자인, 광고, 판촉활동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다. 사실은 정확하게 표현하면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직무를 수행하는 것만을 마케팅이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소비자들은 주로 제품과 광고, 판촉 프로모션의 형태로 마케팅을 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오해가 쌓이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현상을 이해하고 있는 방식에 오인지가 있다면 그것은 스피커의 잘못이지, 청중의 잘못은 아니니까. 그러나 내가 몸담고 하고 있는 일을 다른 사람들이 제대로 인식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것이 마케터가 사회에서 분담하고 있는 기능에 대한 온당한 평가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이미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이고 우리는 많은 제품과 광고, 판촉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하루에도 수십수백 가지의 브랜드를 보고 듣고 소비하고 사용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는 TV와 하루 종일 손을 떠나지 않는 스마트폰에서 보게 되는 광고, 길거리에서 계속 마주치는 간판과 광고의 각종 로고들, 마트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프로모션, 경품, 판촉물들까지. 이 모든 것들이 마케팅 활동의 산출물이고 우리는 이런 것들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만나고 있다. 그것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그래서 너무 익숙하고 일상적이기 때문에 마케팅이라는 일도 그렇게 어렵거나, 전문적이거나, 대단치 않게 생각하는 일도 있다. 혹은 “마케팅? 그거 광고 만드는 거 아니야?”라는 주변의 질문에 애써 대답하느라 진땀을 빼는 일도 있고 또는 때때로 편법, 불법적 마케팅이 횡행하면서 “비도덕적 상술”이라는 뉘앙스를 고정관념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설명해야 하는 일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무관심의 시선에 애써 의연한 척해야 하는 때도 있다.
마케팅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런 점은 조금 안타깝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인식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그래서 마케팅이라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을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한국에서 마케터로 산다는 것은 이러한 오해 혹은 무관심을 견뎌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 마케터는 무수히 많다. 특별한 자격이나 대단한 전문지식이 있어야 하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업의 특성상 창의성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른바 “촉”이 좋으면 할 수 있는, 최신의 유행에 민감한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리고(다른 일도 그렇지만) 운과 타이밍도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전문가의 이미지보다는 뭐랄까, 딱히 필요한 지식이나 경험 없이 감만 가지고도 적당히 해나갈 수 있는 직업이라는 이미지도 가지고 있다.
맞는 말이다. 마케터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진입장벽이 낮은 것도 사실이다. 특정한 자격과 지식, 경험이 없으면 아예 시작조차 할 수 없는 의사, 변호사와는 다르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많은 마케터가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지난 십여 년간 마케팅을 해왔다, 넓은 의미로는 15년째 해오고 있다. 다양한 브랜드를 담당하며 많은 일을 해보았고, 수십억 원을 주무르며 광고매체를 집행하는 일도 해봤다. 영업 일선에서 거래처를 다니며 일해보기도 했다. 그런 나에게 마케터라는 직업에 대해 묻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해야 마케터가 되는지, 마케팅에 대한 주위의 오해로 떨어진 자신감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묻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나도 잘 모른다. 고작 15년 이 일을 해왔을 뿐인데 어떻게 정답을 알겠는가?
그러나 단언컨대,
누구나 마케터가 될 수 있지만 좋은 마케터는 아무나 될 수 없다.
시장과 트렌드의 미묘한 변화를 재빠르게 캐치하고, 소비자 자신도 모르는 숨겨진 욕망을 파악할 수 있는 마케터, 창의력을 가지고 새로운 꿈을 꾸고 그것을 실현할 기획력과 추진력을 지닌 마케터. 끊임없이 공부하고 지속적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마케터. 궁극적으로 소비자의 인식과 행동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더 좋은 곳으로 바꾸게 하는 가치를 창출하는 마케터. 이런 “좋은 마케터”는 흔히 볼 수 없다.
한국에서 마케터로서의 삶은 화려한 광고로 대변되는 사람들의 오해 또는 무관심, 그 뒤에서 필사적으로 손과 발을 움직이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무수히 많은 일들의 연속이다. 그래서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한국에서 “좋은 마케터”로 살기 위해. 그래야 마케터라는 업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는 인식이 바뀐다.
브랜딩만 하는 브랜드 매니저부터 위에서 설명한 모든 단계의 활동에 관여하는 프로덕트 매니저 개념의 마케터도 있다. 광고만 전담하는 광고회사에도 AE, 제작 등 여러 직군이 있으며 이들도 마케터라고 볼 수 있다. 마케팅이라는 활동이 담당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일중 이들이 담당하는 것은 일부분이다.
하나 확실한 것은 브랜드 매니저라고, 카피라이터라고, 디자이너라고 그 일에만 몰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이 마케팅이라는 큰 강 속의 일부라고 해도 큰 강의 모습을 그려나가며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강이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극적으로 어떤 바다에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게 될지 고려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의 마케터가 될 수 없다. 어떤 제품이 세상에 나오고 소비자를 만나고 사라지는 과정 전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하루하루 일을 하기 급급한 직장인이 될 뿐이다.
평범한 마케터는 하루하루 일을 하기 급급하지만 좋은 마케터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좋은 제품이나 서비스, 정책과 철학을 만들면 세상은 어제보다 조금 더 좋은 곳이 된다. 바퀴가 그랬고, 전기가 그랬다. 컴퓨터가 그랬고 아이폰이 그랬듯이, 단지 회사의 매출을 증대시키는 것에서 벗어나 세계와 인류를 진보시키는 역할을 할 수도 있는 사람이 우리 마케터이다. 그 진보가 인류의 거대한 도약이든, 아주 작은 한 발자국이든 그 크기가 중요하지는 않다. 우리가 어제보다 오늘을, 내일을 아주 조금 더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면 우리가 마케터로서 존재하는 이유. 그리고 마케터가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로서 충분하다. 쳇바퀴 돌듯 하루하루를 살아지는 직장인, 당면한 작은 업무들에 치여 전체를 보지 못하고 늘 급급한 마케터가 되지 말고 좋은 마케터가 되자.
그런데 어떻게 좋은 마케터가 되느냐고?
미안하지만 이 글에는 좋은 마케터가 되는 비법이나 지름길 같은 건 없다. 왜냐하면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좋은 마케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 언젠가는 나와 내 주변을, 그리고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 나아가 세상을 조금은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는 좋은 마케터가 되고 싶다. 아주 조금이라도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글은 누군가가 읽고 깨닫기를 바라고 쓴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 글은 그동안 내가 현업에서 겪어오며 저질러 왔던 온갖 실수와 그 결과에 대한 총체적 기록이고 내 지난 어리석음에 대한 처절한 반성문이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솔직하지만 구차한 변명이다.
이 글을 읽게 될 누군가가(만약 있다면) 좋은 마케터가 되기를 바란다면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들을 모아놓은 오답노트가 되기를 바란다. 미물이라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배울 것이 있다고 했다. 여러분도 나의 치기 어리고 어설펐던 지난 과정들을 읽으며 ‘아,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정도는 배우며 글을 닫는다면 좋겠다.
내 목표는 바로 ‘어제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좋은 마케터가 되는 것’이다. 어차피 거창하고 원대한 사람이 될 능력은 없다. 다만 손가락 한 마디 정도만큼이라도 나아지는 점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닐까. 비교대상은 다른 이가 아니다. 바로 어제의 나다. 어제의 나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것. 결코 어렵지 않다. 내가 겪어온 작은 성공과 크고 많은 실패의 경험을 통해 아주 조금이라도 배울 수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좋은 마케터가 되는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이미 글을 여기까지 읽었으니, 그 길은 이미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