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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마스터 Jul 29. 2019

아버지와 자전거

비와 자전거,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한 커피 한 잔의 추억

그날도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나를 데리러 면사무소 앞에 오셨다.

혼자 갈 수 있다고, 번거롭게 자꾸 오시지 말라고 말씀드렸지만 아버지는 듣지 않으셨다. 당신에겐 그 어려운 공무원 시험을 통과하고 면사무소에 다니고 있는 막내아들을 마중 나가는 것이 큰 즐거움인 것처럼 보였다.

'다리 다 나으면 오지 않으마' 남루한 차림을 아들이 행여 부끄러워할까 아버지는 걱정을 하신 모양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아버지 힘드시니까 그렇죠' 괜스레 아버지 마음에 짐을 얹어놓은 것 같아 죄송스러웠다.


다 큰 아들이 연로한 아버지가 몰고 가는 자전거 뒷자리에 타고 가는 모양이 사실 좀 창피했다. 하지만 내 마음을 더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아버지를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큰 누나마저 멀리 떠난 뒤 힘이 부쩍 빠지신 아버지에게 시험에 또다시 떨어졌노라고 차마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매일 아침 거짓으로 출근하고 매일 저녁 거짓으로 퇴근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주에 다리를 접질리는 바람에 아버지가 퇴근시간마다 나를 데리러 오시면서부터 내 죄책감과 불안감은 커져갔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져서 계속 자전거를 타고 가기가 힘들어졌다. 비도 그을 겸 면사무소 근처에 있는 작은 슈퍼에 들었다. 

'잠깐 앉았다 가도 되겄지라' 카운터 맞은편에 있는 작은 테이블을 바라보며 아버지는 말씀하셨고,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주인아저씨는 커피라도 한 잔 하시라며 노란 믹스커피 두 잔을 타서 무심한 듯 내밀었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창 밖을 보며 커피를 마셨다.



'비 오는 거 보면서 커피 마시니까 좋네요' 어색한 침묵을 깨고 내가 말했다. 아버지는 내가 한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창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 옛날에 국민학교 때 기억나냐, 너 다리 다쳐갖고 아빠가 만날 자전거로 학교까지 태워주고 또 집까지 태워줬잖여'

'그랬어요?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사실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왠지 그렇게 반응하고 싶었다. 응석이라도 부리고 싶어서였을까.


'근디 너 실지로는 다리 다 낫고도 몇 주동안이나 계속 아프다고 했지, 그래서 아빠가 그동안 매일같이 널 태우고 다녔고. 기억 안나냐'

'아 그러고 보니 기억나네요, 그때는 자전거 타는 게 너무 좋아서 그랬어요'


잠시 옛날 생각이 나서 미소가 지어졌다. 우리는 잠시 그때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다.


 종이컵에 담긴 커피가 바닥을 드러낼 즈음,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때 아빠는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너 다리 다 나은 거' 왠지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벌써 30년 가까이 지난 일인데.

"근데 아빠는 괜찮았어, 오히려 좋았제' 옅은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는 말씀을 이어 나가셨다.

'아빠도 널 속인 것이여, 네가 다 나았다는 걸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으니께. 널 태우고 가는 길이 참말로 신났고 뿌듯혔거든' 나는 잠자코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널 태우고 가면 사람들이 다 부러워서 쳐다보는 것 같고, 또 니가 좋아하니께 아빠가 되븐게 왠지 뿌듯하기도 하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네가 날 속이고 있었어도 괜찮았다. 아무렇지도 않았어, 그 뒤로 그 기억이 마음속에 턱 박혀있어서 오랫동안 그리웠다'


마지막 한 모금의 커피를 마시고 종이컵을 내려놓으며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그리고 가게 문 앞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니께 말이여' 아버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른 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께, 아빠는 지금도 괜찮다.'


내 마음은 덜컥 내려앉았고, 아버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빠는 그냥 널 태우고 가는 길이 좋은 거니께, 괜찮다 지금도. 그러니께 너도 마음 졸일 필요 없다'

나는 할 말을 잊은 채 괜히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빗줄기는 잦아들기 시작했고 구름 사이로 햇빛이 슬며시 비추기 시작했다.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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