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무나야?”
S은행 6년 차 대리 은비는 자신이 아니라 남자친구 김재혁 씨의 문제로 준수의 클리닉에 다니고 있다. 첫 번째 상담에는 두 사람이 같이 방문했다. 재혁은 주식 중독과 우울증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극단적인 도파민형, 도박형 투자자인 재혁은 많은 환자가 그렇듯 자신의 문제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첫 번째 상담일 준수의 병원에 들어서며 재혁은 은비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 됐지? 난 약속 지켰다! 이제 돈 빌려줘.”
억지로 끌려온 티를 온몸으로 내면서 시종일관 건성으로 상담 전 설문에 임하던 재혁은 결국 대기실에서 은비와 고성을 지르며 다투었다. 간호사들이 둘을 뜯어말려 겨우 상담을 시작할 수 있었다. 준수가 주식과 코인 투자로 총 얼마를 잃었는지 물었더니 재혁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무척 불쾌해했다.
“하루에 1억 원 번 적도 있고 2억 원 잃은 적도 있어요. 왜요? 선생님은 얼마나 버는데요? 연봉이 얼만데요?”
준수는 동요하지 않고 재혁에게 주식투자를 할 때 어디서 정보를 얻는지 물었다. 전문가의 분석을 참고하는지 물어봤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주식에 전문가가 어딨어요? 다 운발이지.”
재혁의 답을 메모하던 준수가 추가 질문을 했다.
“왜 주식투자에서 반복적으로 손실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동훈이 씹새끼… 아, 욕해서 죄송합니다. 친구 새끼가 잘못된 정보를 줘서요. 아, 그 찌라시 카톡방이 문제예요. 역시 공짜방은 안 돼. 지금 새로 들어간 데는 VVIP 유료 방이라 확실해요. 진짜예요. 완전 1티어들만 모였다니까요? 그런데 총알이 없네. 선생님이 은비 좀 설득해주세요. 진짜 수익률 300퍼센트 확실합니다. 얘가 믿지를 않는다니까요?”
“혹시 재무제표 분석이나 회계 공부를 따로 하시나요?”
“그런 건 시간 낭비예요. 은비도 저한테 맨날 그런 이야기하는데 제 주변에 경제학과 나온 애들 진짜 많거든요? 그 애들 주식 계좌 전부 반 토막 났어요. 회계, 분석 다 소용없어요. 흐름을 읽을 줄 알아야죠.”
준수의 예상대로 재혁은 2주 차부터 클리닉에 오지 않았다. 은비 얼굴에 그늘이 더욱 짙어졌다.
***
은비와 재혁은 만난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 오랜 시간 재혁과 함께하며 은비는 재혁에 관해 모르는 것이 없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 확신이 사실 착각은 아니었는지 의심되었다. 언젠가부터 재혁의 충혈된 눈은 초점을 잃었다. 늘 달콤한 사랑의 말을 속삭이던 그의 입은 3분에 한 번씩 “씨발”을 내뱉었다. 욕 한 번 할 줄 모르고 제대로 화낼 줄도 모르던, 머리를 긁적이며 수수한 미소를 짓던 남자친구에게 생긴 갑작스러운 변화가 은비는 너무 낯설었다.
원래 재혁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일찌감치 은행에 취업한 은비는 행복한 가정을 이룰 날을 꿈꾸며 수험생 남자친구를 뒷바라지했다. 재혁은 자신의 공부 때문에 은비와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하지 못하는 것을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은비는 그런 남자친구의 애틋한 마음이 고마워 그에게 더 잘해주고 싶었다. 재혁이 시험에 합격만 하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탄탄대로 같아 보였던 둘의 미래에 조금씩 균열이 생긴 것은 재혁이 주식투자를 시작한 뒤부터였다. 차라리 처음부터 돈을 잃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느 날 초심자의 행운으로 몇백만
원 정도 투자 수익을 낸 재혁은 수험 생활을 아예 접겠다고 선언했다. 은비는 남자친구의 파격적인 발표에 놀라 앉은 자리에서 펄쩍 튀어 올랐다.
“취업 포기하고 주식투자에 올인한다고? 그게 말이 돼?”
“아무 걱정 마, 은비야. 오빠가 다 생각이 있어. 이렇게만 하면 우리 은비 샤넬 가방도 사주고 강남에 신혼집도 얻어줄 수 있어.”
“주식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던데. 예전에 우리 부모님도 많이 손해 보셨고….”
은비의 걱정에 재혁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아무나? 내가 아무나야? 또 나 무시하는 거야? 너 그깟 은행 다닌다고?”
“그 말이 아니잖아. 내 말은…”
“씨발, 그만하라고!”
그날로 재혁은 전업 투자자, 데이 트레이더를 운운하며 모니터를 두 대 더 구입했다. 그리고 점점 집에서 나오지 않기 시작했다.
***
두 번째 상담 날 은비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던 준수가 은비에게 물었다.
“남자친구가 은비 씨에게 지금까지 빌린 돈이 총 얼마쯤 되나요?”
은비는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우선 4700만 원. 6년 동안 은행에서 고객에게 온갖 모욕과 성희롱을 참아가며 모은 피 같은 예금과 적금이었다. 거기에 재혁은 은비가 차곡차곡 모아온 보험 납입금까지 탈탈 털어갔다. 여기서 멈췄다면 그나마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재혁은 은비의 이름으로 신용대출을 3000만 원이나 받았다. 은비가 부모님께 결혼 준비 자금으로 빌린 돈 3000만 원까지 고스란히 남자친구의 투자금이 되었다. 그렇게 총 1억 원 넘는 돈이 모래성처럼 사라졌다.
결정적으로 재혁이 망가지기 시작한 것은 그놈의 유료 리딩방 때문이었다. 재혁의 스마트폰에는 항상 이런 메시지가 왔다.
‘C하이텍, 세력 유입 시작. 내일 9시부터 상한가 갑니다, 최소 3연상.’
‘D제약, 코로나 관련 수혜주. 어제 말씀드렸죠? 80퍼센트 수익 보장합니다.’
재혁은 투자 정보를 얻기 위해 각종 유료 단체 카톡방, 유료 텔레그램방, 상따방 등에 가입했다. 그곳의 방장들은 누가 봐도 사기가 분명한 내용을 투자 정보랍시고 뿌리고 한 달에 50만 원씩이나 수수료를 요구했다. 재혁은 유료방의 지시에 따랐다 상한가를 두세 번 경험한 뒤로 하느님보다 방장의 말을 더 신뢰하기 시작했다. 재혁에게 유료 리딩방은 거의 종교였다. 사실 틀린 정보가 100개는 더 많았지만 말이다.
두 번째 상담을 한 날도 은비는 재혁의 자취방에 들렀다. 눈이 벌게져 각종 유료 리딩방을 들여다보던 재혁의 거북목을 째려보며 준수의 말을 떠올렸다. 인간의 해마체는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기억만 취사선택해서 저장하려는 성향이 있다고. 분노, 불안, 두려움 같은 감정은 무의식적으로 잊어버리고 회피하고 싶은 방어 기전이 존재한다고.
재혁의 집에 쌓인 뜯어 보지도 않은 대출 독촉장, 밀린 공과금 고지서를 무기력하게 바라보던 은비에게 재혁이 말했다.
“야, 최은비. 나 진짜 마지막으로 1000만 원만 더 빌려줘. 이번엔 진짜 확실해. 지금까지 손해 본 거 다 복구할 수 있어.”
도대체 왜 오빠는 나한테 자꾸 돈 이야기를 할까? 은비는 네 가지 가설을 생각해봤다. 첫째, 나를 ATM으로 생각한다. 둘째, 제2금융권 대출 한도까지 이미 다 빌려 쓴 상태다. 셋째, 나한테 빌리면 무이자니까. 그리고 넷째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울컥 화가 난 은비가 재혁에게 쏘아붙였다.
“내 이름으로 대출까지 받아놓고 그 말이 나와? 오빠가 사람이야? 우리 부모님 돈까지 빌렸잖아! 이제 진짜 없어! 먹고 죽으려고 해도 없어!”
“진짜 확실하다니까. 나 좀 믿어봐, 마지막으로! 우리 다시 돈 복구해서 결혼해야지.”
은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오빠 우리 그러지 말고 병원 다시 가보자, 응? 한 번만 다시 가보자.”
“야, 최은비. 씨발, 내가 만만해? 내가 정신병자야?”
“오빠, 제발 상담받으러 가자. 부탁이야….”
은비의 애원에도 재혁의 태도는 흔들리지 않았다. 은비는 재혁의 오른팔을 꼭 붙잡았다. 재혁은 그대로 앉아 다리 한쪽을 덜덜 떨며 고지서 더미를 응시했다. 몇 분 뒤 재혁이 무언가 결심했다는 듯 은비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 너네 부지점장이랑 팀장 이번에 둘 다 일주일간 휴가 간댔지.”
은비가 코를 훌쩍이며 갑자기 왜 그런 것을 묻느냐는 얼굴로 남자친구를 바라봤다.
“딱 3일이면 돼. 너희 은행 돈 오빠한테 좀 빼서 보내줘. 아무도 모를 거야.”
***
“상처받은 개미들이여, 구주 클럽으로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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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석 지음
12월 14일 출간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