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조선시대의 기록들이나 상당히 오래된 고문서 같은 자료를 들여다보는 일은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가. 마치 누군가 숨겨놓았던 보물을 찾아내는 기쁨처럼 우리가 모르던 일상과 문화가 드러나는 경험은 비단 역사학자들만의 흥분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하고 끝이 없으며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하겠지만 여전히 흥미롭고 궁금하고 재미있다.
혹시 당신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궁금해한 적이 있는가? 가깝게는 가족, 친지들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멀리 연예인들의 사생활 소식, 그리고 유명한 사람들의 일상 이야기나 역사적 인물들의 생활들도 모두 궁금증의 대상이 될 것이다. 우리는 많은 역사적 자료를 통해서 선조들의 삶을 유추해볼 수 있고, 수많은 소설이나 에세이들을 통해서 각각 다양한 타인들의 삶들을 들여다볼 수 있다. TV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도 수많은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삶의 양태가 끝없이 펼쳐진다. 그것이 인문학이고 인간 존재의 흔적이다.
그런데, 여기에 매우 독특한 이야기를 가진 모임이 있다. 지구 외딴곳에 떨어져서 사는 원주민도 아니고, 피라미드 속에 묻힌 선조들의 이야기도 아니다. 바로 우리와 같이 살아가는 우리의 가족, 친척, 옆집 이웃일 수도 있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들이다. 수많은 할머니들이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었고 많은 분들이 아직도 살아계시다. 그분들은 남존여비의 문화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시댁이라고 하는 남편 가정의 일원이 되어 부지런히 자녀를 낳고 일을 했으며 가정을 일궈야 했다. 우리나라가 역사적 격변기를 맞이하던 시절, 가진 것 없이 맨 몸으로 시대의 풍랑과 물결을 맞닥뜨려야 했으며 가족을 지키고 살아남아야 했다. 그분들은 한 마디로 역사의 산 증인이었으며 가정의 파수꾼이었고 한국의 어머니들이었다.
지금과는 다르게 한국전쟁 이전의 시골의 어머니들은 글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여자들은 다른 집에 시집가서 살아가는 존재로 인식되어있었고, 아들만이 집안을 지키며 가문을 이어나가며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여자들은 집에서 공부를 시키지 않았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여자가 집에서 글을 읽고 공부를 하고 있으면 구박을 당하기 일쑤였으며, 결혼을 해서도 집안일과 부엌일, 농사일을 하지 않고 글을 보거나 공부를 하고 있으면 혼이 나거나 쫓겨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러한 인생을 살았던 일부 할머니들이 이제 21세기가 되어, 자녀들이 훌륭하게 성장을 하고 보다 풍요한 시대가 펼쳐짐에 따라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즉, 글을 배우지 못하고 평생을 살았던 할머니들이 글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할머니들의 글 속에서, 마치 화석을 발견하는 고고학자의 흥분 같은 것을 느꼈다. 혹자들은 그저 무식한 시골 할머니들이 고생한 이야기일 뿐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글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마치 막혔던 관로가 숨이트여 물이 뿜어져 나오듯 할머니들의 파란만장한 인생사가 꼬불꼬불한 글씨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수십 년간 몸과 마음속에 베어 들어 단단하게 다져지고 응어리진 기억들이, 마치 이른 봄 햇살에 얼음이 녹듯, 하나둘씩 글로 풀어져 나온다. 그들의 삶은 고통스러웠지만 주변엔 언제나 자연의 힘이 있었다. 그들의 삶 속에는 불평등과 차별이 있었지만 주변엔 언제나 가족이라는 위로가 있었다. 그들의 삶 속에는 언제나 죽음의 공포가 있었지만, 주변에는 언제나 새로운 생명이라는 결실이 있었다. 우리가 쉽게 단순한 시골 할머니로 여기고 지나쳤던 그들의 삶 속에는 화가가 되고 싶었던 열망도 있었고,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꿈도 있었고, 가수가 되고 싶었던 희망도 있었다.
수 십 년을 훨씬 뛰어넘은 삶의 흔적들이 서툰 글씨체로 아주 정확한 기억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몸짓 하나하나, 마음 하나하나, 목소리 하나하나 그분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아.... 기억의 힘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증언의 힘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나는 이것이 진정한 인문학이라고 생각한다. 온갖 세련된 미사여구로 포장되고 상품화된 똑똑한 소설가들의 허황된 이야기들보다도 진실한 고된 인생기억의 속삭임! 흙 속에서 살아 거칠어지고 딱딱해진 할머니들의 주름과 손길 속에서 나는 이야기의 힘과 증언의 축복을 누릴 수 있었다.
추천하는 책 4권과 일부 작품들을 인용해본다.
저는 충북 괴산군에서
아버지는 쌀장사를 하시고 할머니는 떡장사를 해서
형편이 좋은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쌀장사를 해서 번 돈을 모두
사기를 당하고 다시 물감장사를 해서 번 돈은
나쁜 사람들에게 다 털렸습니다.
우리집은 빈털터리가 되어 문경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내가 열한 살 때 피난을 갔을 때 일입니다.
피난길에서 동생이 죽었습니다.
죽은 동생을 어디다 두고 갈 수가 없어서
하루 종일 업고 다녔습니다.
지금도 죽은 동생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김영분-
내가 열 살 때 난리가 났습니다.
나는 왜놈들에게 끌겨갈까 봐
맘 놓고 밖에 나가지도 못했습니다.
일본놈들은 학생들보고 보리를 밟으라고 시키기도 했습니다.
나도 학생인 척 어울려 다니며 보리를 밟기도 하였습니다.
날마다 무서웠습니다.
그리고 열다섯 살 때 일입니다.
옆집에 살던 친구 둘이와 나는 호롱불을 켜 놓고 수를 놓았습니다.
그런데 밖에서 나무 부러진 소리가 나더니 친구가 한 명씩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연락이 끊겼습니다.
나중에 들리는 소문에 친구 둘이는
군인을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친구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살았다는 말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소식을 알 수 없습니다.
-라양임-
젊었을 때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몸이 많이 아팠습니다.
하루는 이웃집에 사는 친구와 영등포시장을 갔습니다.
그런데 내가 몸이 아프다보니 약초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아들 중학교 납부금을 주고 약초를 샀습니다.
없는 형편에 겨우 마련한 납부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약을 알아봤더니 가짜였습니다.
나는 사기를 당했다는 생각에 비참했습니다.
그래서 죽어야겠다 생각하고 정리를 했습니다.
청소도 하고 이불 빨래도 했습니다.
그리고 연탄불을 방에 피워놓고 방문을 잠갔습니다.
그런데 퇴근해서 들어온 남편이 놀라서
창문을 깨고 들어와 나를 살렸습니다.
남편은 돈을 또 벌면 된다고 달랬습니다.
미안하고 고마웠습니다.
-손경애-
육이오 전쟁 때
다부동 우확산에 이북 인민군이 점령하여
마을 이장님이 피란을 가라고 방송하였다
피란을 갈라고 집을 나온이
소와 닭이 울렀다
그때 마음이 서럽다
-김춘조-
점심을 먹고 노인정 간다고
노인정 간다고
골목을 나서니
보리밭에 참새들이
보리를 따먹다가
나한테 들커
훨훨 날아가는
것을 보니
저 참새가 조금한
배나 채워갔는지!
내 양심에 미안하구나.
-이무임-
즐거운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눈이 침침해서
칠판에 글이 안 보였다
눈물이 났다
안과에 가서 수술했더니
아니! 이럴 수가 있나
칠판에 글이 잘 보인다
글이 잘 보여 눈물이 났다
심봉사도 나만큼 좋아했나
-박후불-
무선 꽃이라도
꽃이라면 다조하했어
후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혼자 왜로울 때
찍언 사진을
보면
왜로움이 사라진다
-김도이-
금방 치료받고 집으로 온다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레 세상 떠날줄 몰랐어요
생각하며 할수록 당신이 내 옆에 없단는 것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믿어지지가 않아요
간병을 내 손으로 못해 순짓이 너무 미안하고
하고싶은말 다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요
평생 고생만 하다가 아낀다고 풍족하게
써보지도 못하고
오늘도 마당에 있는 하우스 정리하다
당신이 타던 오토바이 경운기보니
당신 생각이 많이 납니다
꿈속에서라도 한번 만날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당신한테 갈때까지 잘계세요
-허남이-
내 어릴적
우리 아버지 돈도 있으면서
공부 안 시켜 주신게
너무 비감이 든다
여자는 공부해 놓으면
건방만 지긴다고 안시키더이
혼인 갈때는 와 안 갈찼노하고
후희하시더라
나만 어리면
하고 또 할낀데
지금은 머리가 안 따라줘
비감이 든다
-이묘연-
밭에서 김을 매는데 젊은 여자가 보건소에서 나왔다면서
치매 조사를 하고 갔다. 나 사는 동네 아냐고 해서
강원도 양양군 서면 송천리라 했더니 올해 무슨 년이냐고
물어서 2014년이라고 대답했다.
오래 살다보니 별일이 다 있다
-이옥남-
오늘은 장에 가서 명태 다섯 마리에 오천원 주고 사고
또 오징어 제친 거 오천 원 주고 과질 사천 원 주고
고구마 이천 원 주고. 망태 매서 팔은 값 만 원 찾아가지고
주전자 만 원 주고 사고 그럭저럭 가고 오는 차비까지
삼만 원 돈을 다 썼네.
벌기만 힘들지 쓰는 것은 정말 시간도 안 걸리네.
별로 산 것도 없이 돈 삼만 원을 그렇게 쉽게 썼네.
-이옥남-
1. 시가 뭐고?
2015년 삶창 출판사 발행. 강금연 외 88명 지음
칠곡의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우고나서 직접 쓴 시들을 모은 시집.
칠곡군의 인문학도시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2. 콩이나 쪼매 심고 놀지머
2016년 삶창 출판사 발행. 강봉수 외 118명 지음
마찬가지로 칠곡군에서 한글을 배운 할머니들의 글모음 집 2편이다.
3.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2019년 남해의봄날 발행. 권정자 외 19명 지음
순천시의 평생학습관 초등반에서 한글을 배운 할머니들의 글모음이다.
직접 그린 그림들도 같이 실려있다.
4. 아흔 일곱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2018년 양철북 발행. 이옥남 지음
1922년생 이옥남 할머니께서 스스로 한글을 깨우쳐 노령의 나이가 되어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고, 30여년간 쓴 시골생활의 일기를 지인들의 도움으로 책으로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