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 이란 무엇일까?
원망이나 분노의 감정인가. 아니면 정서의 한 형태를 말하는 것인가.
1993년도 임권택 감독이 제작한 영화 '서편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서편제'라는 단어는 판소리의 한 유파로, 어학사전 등의 정보에 따르면 섬진강 서쪽의 보성, 광주, 나중 등지에서 발달하였으며 음색이 곱고 애절한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한편 동편제는 호남의 동쪽인 구례, 운봉, 순창 등지에서 발달하였으며 음색이 웅건하고 그윽하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산야를 배경으로 하여 아름다운 실루엣과 옛 시절의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그려지고 마치 동화 속 이야기처럼 슬프고 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판소리와 함께 어우러져 펼쳐진 영화 서편제는, 임권택 감독의 작품 중 명작 중의 명작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 서편제는 이청준 작가의 '남도사람'이라는 연작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남도사람'은 총 5편으로 되어 있으며 첫 연작인 서편제를 시작으로 하여,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 새와 나무, 다시 태어나는 말]의 순서로 진행된다. 각각 길지 않은 단편 소설들이고 하나의 내용으로 이어져있다. 이 중에서 특히 두 번째 작품인 '소리의 빛'이라는 작품이 영화 서편제의 주요 모티프가 된다.
나는 남도사람 연작의 첫 부분을 읽으면서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신화적 힘을 느꼈다. 사연이 시작되는 형태가 '소리'와 어우러지면서 매우 강력한 힘을 갖는다는 것을 목격한다. 그 소리는 태양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강하게 내리쬐는 에너지를 응축하듯 가면을 쓰고 산허리에서 마치 뱀처럼 기어 나온다. 얼굴도 보이지 않고 표정도 없다. 마치 장님의 불운을 예견하듯, 눈이 아닌 귀와 소리로 서로를 더듬으면서 찾아가고 있다. 원하든 원치 않든 마치 자석에 쇠붙이가 딸려가는 형상 같다. 그것의 탄생과 까닭의 첫 실마리는 그 지역과 시대와 인물들 간의 정서가 하나로 합쳐지고 융합되어서 만들어진다. 그리하여 각 요소들은 서로의 필연이 되었으며 그 연결고리 속에서 자연스럽게 서사가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날 그 모습을 볼 수 없는 노랫소리는 지종일 해가 지나도록 숲 속에서 흘러나왔고, 그러자 한 가지 이상스런 일이 일어났다. 밭고랑만 들어서면 우우우 노랫소리도 같고 울음소리도 같던 어미의 그 이상스런 웅얼거림이 이날따라 그 산소리에 화답이라도 보내듯 더욱더 분명하고 극성스럽게 떠돌아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어미는 뜨거운 햇볕 아래 하루 종일 가물가물 밭이랑 사이를 가고 또 오갔다. 그리고 마침내 산봉우리 너머로 뉘엿뉘엿 햇덩이가 떨어지고, 거뭇한 저녁 어스름이 서서히 산기슭을 덮어 내려오기 시작하자, 진종일 녹음 속에 숨어있던 노랫소리가 비로소 뱀처럼 은밀스럽게 산 어스름을 타고 내려왔다.
남도사람에서 '한(恨)'라는 테마는 눈을 멀게 하는 방식으로 접근된다. 왜 모든 신화와 역사 속 인류에게는 제물이 필요했다고 했던가. 어머니를 죽인 원수라는 비운적 숙명, 배다른 형제라는 엇갈린 운명, 기구한 인생을 위해서 눈을 제물로 바쳐야 했던 원한의 감정까지 모두 비극을 극대화한다. 그런데 그러한 비극이 '한(恨)'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정화되고 승화된다. 이것은 기묘한 체험이다. 우리나라 특유의 정서를 이렇게 본질적으로 해부해놓은 작가는 드물다. 토지의 박경리 작가가 역사적 물결 속에 흐르는 우리네 시대적 한을 그려내었다면, 이청준 작가는 우리 고유의 민족적 의식 속 DNA에 뿌리 박힌 정서적 한을 그려내고 있다. 특히 누이와 오라비가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상봉하여 소리를 만들어내는 장면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아픔을 보듬고 삭여내는 '한의 정체성'을 우수하게 표현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는 소리를 굴렸다가 깎았다 멎었다가 풀었다 하면서 온갖 변화무쌍한 조화를 이끌어 냈고, 손님에 대해서도 때로는 장단을 딛지 않고 교묘하게 그 사이를 빠져 넘나드는가 하면, 때로는 장단을 건너가는 엇붙임을 빚어내어 그 솜씨를 마음껏 즐기게 하였다. 그것은 마치 소리와 장단이, 서로 몸을 대지 않고 능히 상대편을 즐기는 음양간의 기막힌 희롱과도 같은 것이었고, 희롱이라기보다는 그 몸을 대지 않는 소리와 장단의 기묘하게 틈이 없는 포옹과도 같은 것이었다.
'한(恨)'이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나라뿐만이 아닌 인류의 보편적 정서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생명을 부지하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고 괴로움일진대, 어찌 그 안에 쌓이는 것이 없겠는가. 하물며 수천 년을 억압과 차별과 불확정의 환경에서 살아온 우리나라의 서민들이 쌓아온 의식 속에는 뱉어내고 싶고 표출하고 싶은 응어리의 뿌리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복수나 증오의 대상으로 변질되지 않고 각각의 기억 속에서 절제되고 정화되어 어떠한 형태의 에너지로 분출되는 것이며, 특히 남도사람이라는 작품에서는 그것이 '판소리'라는 형태의 에너지로 승화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그리스의 전통적인 비극의 중요한 요소를 꼽으면서, 일반인보다 많은 권력과 명예와 부를 가진 사람들이 무너지고 타락해야 하는 플롯의 당위성을 언급하고 있지만, 우리의 정서는 그와는 반대인 것 같다. 우리는 '한(恨)'이라는 독특한 감정 장치를 통해서, 오히려 귀족층이 아닌 평범한 서민들의 삶을 어루만지고 쓰다듬는다.
그 아픔들이 어차피 피해 물러서거나 어거지로 지나쳐 넘어갈 수 없는 인생살이의 짐이라면 그것을 차라리 적극적으로 껴안아 들여 이 세상과 자기 삶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융해시켜 나가는 삶의 자세, 그것을 새로운 창조와 생산의 자양으로 삭여 내어 그 삶을 더욱 덕성 깊고 기품있게 성취해 낸 모습은 먼 데서 찾을 필요 없이 바로 우리 곁의 어머니나 누님들의 모습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는 것이다 - 작가의 말 -
삶의 필연과 고통의 극복이라는 이유때문에 선택해야했던 장님의 운명. 고통을 덜기 위해서 고통을 배가하는 미묘한 감정의 변곡. 아픔을 끌어안고 살아야 했던 우리나라 여성들의 역사와 시대적 애환이, 이청준이라는 작가에 의해서 풍요하고 아름답게 표현되었다고 생각한다. 말(言)과 소리의 무게가 점점 가벼워지고 인간의 삶이 부박하여 이리저리 정착하지 못하고 표표하게 떠다니는 시대에, 아무쪼록 추천할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