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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Jun 04. 2021

말(言)과 칼(刀)

  요즘 같은 시대에 칼을 함부로 휘두르고 다닌다면 어떠한 생각이 들까. 아마도 정신병자로 생각하겠지. 칼을 이리저리 휘두르다 보면 타인에게 상처를 내기도 쉬울 것이고, 자신도 반드시 상처를 입게 된다. 커터칼로 연필만 잘못 깎아도 자칫하면 쉽게 상처를 입지 않겠는가.


  일본 전국시대나 유럽의 중세시대 같은 경우 칼이 자신을 보호하는 방어수단이었을지는 몰라도, 칼이라는 것은 칼집에 있을 때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하는 법이고, 일단 칼이 칼집에서 나오는 순간이면 더 이상 그 사람은 안전하지 않다는 뜻이 된다. 상대방은 타인의 허리춤에 있는 칼집을 보고 그 안에 칼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됨에 따라서 몸가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거칠게 행동할 생각도 줄이게 되며 함부로 공격할 생각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무기라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사용되기 이전에 그것의 형상이 아닌 그것이 가지고 있는 그 자체의 고유한 의미 때문에 힘을 가지는 것이며 무기를 잘 사용하는 사람은 피 한 방울을 흘리지 않고도, 칼집에서 칼을 꺼내지 않고도 위험한 순간과 괴로운 순간들을 미연에 방지하고 비켜가는 것이다. 그것이 칼(刀)이라는 무기의 근본적인 힘인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간의 말(言)이라는 것도 칼과 동일한 것 같다. 말을 함부로 쓰고 다니는 사람을 만나면 마치 내 눈 앞에서 커터칼이 춤을 추는 것 같은 불편함이 느껴질 때도 있다. 말을 함부로 쓴다고 해서 꼭 욕설이나 비속어를 쓴다는 의미는 아니다. 표준어를 쓰면서도 타인을 교묘하게 비난하고 깎아내리기 위한 뉘앙스를 풍기는 말, 누군가를 헐뜯는 말, 불평불만이 가득한 말, 허세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말,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정해진 분위기를 일부러 조장하기 위한 말, 체념이 가득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힘이 빠지도록 하는 말, 때로는 아무 의미도 없고 아무 필요도 없는 아무 말이 허공을 돌아다니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말들이 서로의 입에서 계속 쏟아져 나오고 원치 않게 귀로 들어가게 되면, 마치 칼로 베이는듯한 고통을 느끼는 경우도 허다하다. 


  칼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듯, 말이라는 것도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하물며 유명한 사람들의 말, 권력자의 말, 달변가의 말은 일개 한 자루의 칼에 비길 수도 없을 만큼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특징을 말(言)이라는 기준으로 정한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칼이 칼집에서 그 자태를 뽐내며 고요하게 무게를 감추고 보존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 또한 사람의 입 속에서 가슴속에서 고요하게 그 무게를 갖고 최대한 밖으로 배출되지 않아야 그 의미가 있다. 


말의 세계는 침묵의 세계 위에 세워져 있다. 말이 마음 놓고 문장들과 사상 속에서 멀리까지 움직여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밑에 드넓은 침묵이 펼쳐져 있을 때뿐이다. 그 드넓은 침묵에게서 말은 자신이 드 넓어지는 법을 배운다. 침묵은 말에게는 줄 타는 광대 밑에 펼쳐져있는 그물과도 같다  -침묵의 세계 / 막스 피카르트 -


  말을 사용할 때, 내가 칼을 휘두른다는 심정으로 사용해야 한다. 상대방을 공격할 목적이 아니라면 칼의 날을 보이지 말고 칼 끝을 겨누지 말아야 한다. 내가 칼을 사용함에 있어서 당신을 해칠 의도가 없다는 것을 미리 인지시켜주고, 내가 그 칼로 지금 당신과 내 앞에 놓인 상황을 조리 있게 재단하여 손질하고 정리한 후 당신에게 건네줄 준비가 되어있다는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칼은 무기이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우리의 관계를 정리하고 발전시키는 매개물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언어라는 칼을 잘 사용하려면, 다양한 경험을 쌓고 깊이 있는 인생을 산 선조들과 현인들의 훌륭한 책들을 반드시 많이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한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 언어의 근본적 능력 자체에 대한 존경과 갈망이 있어야 하고, 작은 언어로 보다 풍부한 내용을 효율적으로 전달하고 표현하고픈 욕망이 있어야 한다. 제목만 그럴싸하고, 세련된 허세와 경박한 말장난으로 가득한 책들은 멀리해야 한다.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만 만들어진 책들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치인들의 표심을 얻기위한 책들이라든지 성공과 명예를 부추기는 책들도 정서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간의 삶과 인문학 자체의 시각과 연륜을 느끼려면 고전작가들의 소설 작품들을 읽어보아야 하고, 일상을 마주하는 사소한 센스와 주변을 대하는 날카로운 시각 같은 것을 느끼려면 대가들의 산문이나 수필집을 읽어보면 좋다. 그래야지만, 자기만의 언어 근육이 조금씩 붙고 근력이 늘어나서 시간이 지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훌륭한 언어의 체격이 만들어져 있을 것이다. 


  말 한마디를 잘하면 천냥 빚을 갚고, 말 한마디를 잘못하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 않는가. 사람의 첫인상은 얼굴에서 풍겨오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언어에 의해서 점점 다듬어지고 변하고 형상화된다. 우리는 마네킨처럼 완벽한 마스크를 가진 연예인의 얼굴이 그 사람이 사용하는 경박한 언어에 따라서 점점 추하게 변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반대로 첫인상은 수수하고 시골스러운 외모의 얼굴이 그 사람이 사용하는 단아하고 교양 있는 언어에 따라서 지적이고 우아한 모습으로 변하는 것 또한 경험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소리 내어 말하라고 선언하였는지도 모르겠다.


  말은 칼이다. 

  소중하고 무겁고 신중하게 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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