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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Jun 13. 2021

미시마 유키오의 유작을 접하며.

  풍요의 바다가 한국에서 출간되기를 얼마나 고대하였던지, 몇 년간 ebook 출판 쪽의 개인 번역가들을 검색해가며 번역본을 한참 찾아다니다가 마음을 접고 문득 올해가 되어 알고 보니, 작년 8월 말에 민음사에서 드디어 발매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 시리즈가 71년도에 탈고가 되었으니 그 가까운 나라의 문제작이 동해를 건너 우리나라에 오기까지 50년이 걸린 것이다. 허겁지겁 한 권 입수하고 보니 지금도 1판 1쇄가 그대로 유통이 되는 것을 보면, 국내에서는 여전히 미시마 유키오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금기의 영역이 둘러쳐져 있음을 느낀다.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자결한 돌연변이 천재의 이 거대한 문제작이 도대체 어떠한 것인지 이제 천 단추를 열 수 있게 된 느낌이랄까.

 

  미시마 유키오는 이미 생의 마지막을 예감하고 있었던 듯 1965년 이 작품을 시작할 때부터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밝혔으며, 이 작품을 읽으면 자신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선언하였고, 결국 자신의 작품에 파묻히는 형식으로 1971년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다. 풍요의 바다는 총 4권으로 되어있으며, 1편부터 봄눈, 달리는 말, 새벽의 사원, 천인오쇠로 이어진다. 매우 긴 장편이며, 그중에 1편에 해당하는 '봄눈' 이 작년 민음사에서 국내 출간이 된 것이다. 나머지 3개의 작품들은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미시마 유키오의 기존 작품들의 성향에 너무 짓눌렸던 탓인지, 이 작품을 읽기 시작할 때부터 마치 증거를 찾아다니는 형사처럼 숨은 그림들을 찾아가며, 하나하나 기록해본다. 글을 읽어가면 갈수록 현란한 비유와 셈세한 묘사가 단연 압권이다. 등장인물들이 상황이나 경치, 사건이나 심상을 느끼고 관찰하는 모습을 갖가지 진귀한 비유법을 써서 표현해 보인다. 글 하나하나, 느낌 하나하나 발견하고 발견할 때마다 자그마한 탄성이 나오고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역시 이 양반은 지독하군.... 아마도 자결할 생각으로 이 글을 썼을 테니, 글 하나하나에 붉은 피와 섬세한 칼날이 서려있는 듯하다.


  아직 첫 시리즈이기는 하지만, 혼란스러운 시기 속에서 방황하는 젊은 인물들과 사랑, 죽음, 윤회와 순환의 의미들이 질서 정연하게 펼쳐져있다. 고색창연한 황궁과 신사의 근사한 전통과 서양문화의 시작을 알리는 메이지 시대로부터의 격변이 거대한 소용돌이 속 일본의 교차적 숙명을 드러내는 듯하다. 법학도의 논리로 무장한 이 작품의 구조와 서사는 말할 필요도 없이 세련되고 섬세하며 극적이다. 아직 나머지 작품들의 내용을 알 수 없어서 감을 잡기는 힘들지만, 결국 작가의 평소 성향과 의식 속 흐름대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읽고 또 읽다가 놓치기가 아까워 메모해둔 작품의 구절들을 기록해본다. 마치 레몽 라디게가 다시 태어난 느낌이랄까..... 차원이 다른 작가적 필력의 세계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다음 편이 서둘러 나왔으면 하는 생각뿐이다. 미쳐버린 천재, 미시마 유키오의 유언장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자못 궁금하다.


그러나 기요아키의 눈에는 점차 퍼져나가는 그 아름다운 흰 빛이 주악소리에 맞추어, 마치 산 정상에 쌓여 녹지 않은 눈이 춤추는 구름에 가려 나타났다 숨었다 하는 것처럼 떠오르는 듯 가라앉는듯 보였다.
옆 얼굴이라고도 하기 어려운 각도에서 비전하의 얼굴에 한순간 스친 번뜩임은, 무언가 맑은 결정의 단면을 비스듬히 비춰볼 때 정말이지 한 찰나에 어른대고 사라지는 무지개처럼 느껴졌다.
도리어 무상함이 느껴지는 듯한 미모
짧은 머릿칼이 심홍빛으로 물든 귓전으로 이어지는 곳 언저리, 연약한 내부기관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유난히 얇은 피부가 두근거리는 핏대를 도드라지게했다.
그의 우아함은 가시였다.
깃발이 그러하듯, 바람만으로 살아가는 일
목 깊숙한 곳에서 내솟은 굵은 목소리같은 이 어두운 물소리.
마음 속에서 은밀하게 길러온 곰팡이 같은 감정
병자의 긍지
그녀는 무엇이든 알고 있어. 딱하게도, 나의 미숙함까지
거친 뒷면을 숨긴 비단
파문을 가르는 물고기의 등지느러미처럼 날카롭게 뻗어 나왔다.
맞닿은 입술을 사북으로 삼아, 그 주위로 몹시 커다랗고 향기로운, 보이지 않는 부채가 서서히 펼쳐지는 것을 기요아키는 느꼈다.
자칙하면 날아가 버릴 듯한 아지랑이 같은 관능을 형체있는 것에 의탁해 나타내 붙들어매는 일
마치 하얀종이에 생고기 한 조각을 엉겨붙게하는 듯한 쾌락
탁자위에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둔 화려한 비단 기모노가 어느 틈에 어두운 바닥으로 흘러 떨어지는 것 같은, 그처럼 우아한 죽음
사상에 대해서라면 아는 것이 없는 부인이, 여자들의 지적 각성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완전히 새로운 모양의 알, 예컨데 삼각형 알을 낳는 법을 배운 닭들을 관찰하는 듯한 흥분이 담겨 있었다.
신카와 남작의 마음은 은과 같아서 모처럼 공들여 담아 집을 나서는 사람들 속에 섞이면 금세 무료함이라는 녹이 슬었다.
잠깐 머리에 손댈 때 그 한 순간의 쓸쓸한 무심함....
회복기의 환자가 겁을 내면서도 건강에 소홀히 하듯이....
그것은 죽음이나 보석의 광채, 저녁 해의 아름다움을 다른 이에게 말로 전달하는 일의 지난함과 같은 것이었다.
물과 물이 이어지는 순조로운 연쇄의 불가사의
음독한 노파가 분갑에 굴러들어간 귀뚜라미꼴로 화장을 하고 팥색 잠옷을 걸친 채 웅크린 모습은 그 작은 덩치만큼 도리어 온 세상을 뒤덮을듯한 음울함으로 가득차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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