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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Feb 03. 2022

구습(舊習)의 악순환

  근 15년간 특별히 육아에 관심을 갖고 살다 보니, 여성이 아닌 남성의 입장과 시각에서 보이고 느껴지는 것이 많은 요즘이다. 남성들이 육아와 가정을 등한시한 채 오로지 사회적인 관계와 경제활동에만 치중하던 시대가 아니니만큼, 이제는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도 엄마 아빠 치우칠 것 없이 그 역할과 의무, 권리를 동등하게 나누려 하고 있고, 직장과 사회에서도 불과 십수 년 전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남녀의 역할과 인식이 바뀌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하지만, 근 2~3년간 딸아이의 학습과 학원문제 등에 깊숙이 관여하다 보니, 일상 곳곳의 여러 각도에서 아직도 근절되지 못한 구시대의 유전과 악습의 굴레를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눈에는 환하게 보이는데, 말로 설명하기에 복잡하고, 또한 생각할수록 답답한 이 현상을 어떻게 언급할 수 있을까.




1. 독점적 엘리트 집단의 출현

  80년대에나 들어야 할 법한 소리를 지금도 들어야 한다니 일단 아연실색이다. 우리나라에서 타인의 생명과 재산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집단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흔히들 의사, 판검사, 변호사 들이라 일컫는 대한민국의 독점적 엘리트 직업군들이었을 것이다.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고, 타인의 재산과 명예와 권리를 들었다 놓았다 할 수 있는 초(超) 권력.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난히 그러한 전문지식을 가진 집단에 공포심을 갖고 살아왔다. 공포심이라는 것은 최초의 폭행과 피해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 심리이다. 사형과 구금 제도 자체가 없는 원시 밀림의 부족집단에 들어가서 아무리 그것을 설명한다고 한들 사람들은 반응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력으로 무장한 뒤 쳐들어가서 아무런 경고 없이 누군가를 사형시키고 구금시킨 이후에 그 대상이 이러한 이유로 그렇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조건화하는 순간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그 현상은 명확하게 '각인'된다. 그러고 난 이후부터 사람들은 동일한 피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그 조건들을 숙지하게 되고, 자신의 행동이 그 조건에 부합하는지 아닌지 계속 자기 검열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계획된 공포심이고, 이때부터 그 공포심(phobia)을 이용하려는 부류와 피하려는 부류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부터 이러한 포비아를 이용하려는 지배계층의 구조가 너무 단단하고 두터웠다. 국민들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과 노비, 천민, 상인들은 양반 관리와 관료들의 명령과 지배에 따라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생 자체를 이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집을 빼앗기고 땅을 빼앗기고 곡식을 빼앗긴다는 극심한 공포, 즉 '생의 포비아'가 가장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수백 년 된 지배 계층이라는 것이 무사나, 기술자, 공학자 혹은 예술가 집단이 아닌, 성리학의 이념과 유교적 예법으로 중무장한 문인(文人)들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기능과 물질, 효율과 실용성을 따지는 유물론적 가치를, 글이나 사상 같은 것을 우선시하는 관념론보다 등한시했다는 것이고, 거꾸로 되짚는다면 다른 나라, 혹은 다른 지역으로부터의 침략, 혹은 전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기술진보와 국가 방어체계의 시스템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뜻도 된다. 이유인 즉, 인류 역사상 기술의 발전과 물질적 진보 같은 것들은 전쟁, 다시 말해 침략과 방어라는 과정을 통해서 가장 빠르게 추구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는 훗날 상인과 기술인을 천시하는 악습을 더욱 견고하는 큰 원인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즉, 기술인을 등한시하는 성리학 유교사상, 침략에 대비하지 않는 태만한 국가적 방어체계, 견제나 감시 시스템이 없는 독점적 왕권 관료 체재의 3박자가 수백 년간 우리 민족의 의식구조에 아주 깊게 뿌리내렸다고 볼 수 있다.


  나의 생이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의 권력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불안감, 똑같이 사람으로 태어나도 누구는 노비로 태어나는 것이 당연하고 누구는 귀족으로 태어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혈연주의, 일생을 일 한 번 하지 않고 살아도 아무런 피해 없이 고스란히 자신의 지위와 재산을 물려줄 수 있는 양반관료 체재는 수백 년 동안이나 쌓이고 쌓여서 단단하게 굳어진 지층의 암반처럼 우리 민족의 DNA에 깊게 자리 잡았고, 지배계층이라는 것은 일반 서민과는 동떨어진-일종의 신성한 영역이라든지 선택받은 사람들의 전유물로 인정해버리려는 분위기가 너무 당연한 듯 자리 잡게 된 것 같다(이것은 어찌 보면 그러한 것을 빨리 인정해버려야 서민들의 지위와 운명에 당위성이 생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제 식민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이 수백 년 된 구습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양반관료 체재는 사라졌고, 전 국민은 원한다면 누구나 자기만의 땅을 가질 수도 있게 되었다. 불과 50년 만에 상투와 망건을 던져버리고 양복을 입고 자동차를 타고 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개화 이후 5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수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여러 가지 백신을 맞으면 일찍 죽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기계를 사용하면 더 많은 곡식을 빨리 추수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열심히 노력하면 가난해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돈이 많은 사람이라도 죄를 함부로 저지르면 감옥에 가고 인생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도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단 한 가지 변화되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아주 특정한 일부 지배계층을 국민들이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도구나 장치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물며, 그 이후로부터 70년이 지난 2022년에 와서도 아직 그 부분은 제대로 해결되었다고 보기 힘들지 않을까. 그러한 이유들로 고려해볼 때 흔히 대한민국의 의사, 변호사, 판검사로 불리는 독특한 엘리트 집단군, 다시 말해 작은 언행으로 국민들 대다수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대체 불가하고 전문적이며 배타적이고 완전히 독점적이면서도 마음을 먹는다면 막대한 돈을 벌 수도 있도록 되어있는 자체 구조의 폐쇄적 직업군은,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그만큼의 책임을 지지 않아도 무방한, 일종의 면책특권과 권력 오용의 가능성을 포함한 집단으로 인식되는 것이 그리 어색하지 않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그러한 견제와 감시의 사각지대를 노리는 기존 지배계층과 권력가 집단의 범위가 그 편의와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변이, 변형되었다고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안정된 기간을 보장받으면서도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는 금전적 이익을 누리는 알 수 없는 그곳. 한국인들에게는 유난히 트라우마인 그 단어, '죄인'이라는 족쇄를 씌울 수 있는 권력. 신성불가침한 영역으로 만들어져, 그 누구나 허리를 굽신거리고 구걸을 하도록 만드는 별세계. 어린 시절부터 타인과의 약육강식적 점수 경쟁에서 이기고 이겨서, 좁은 관문만 통과하면 입성할 수 있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부와 명예와 권력의 칼자루를 쥐어볼 수도 있다고 하는 천상의 등용문 바로 그 집단.


  갑자기 불어닥친 개화의 물살. 외세와 무력에 의해 들씌워질 수밖에 없었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재의 방임적 혼란기 속에서 우리 민족의 의식 속 저 깊은 밑바닥에 깔린 억압과 열등의 회한은 세상 밖으로 터져 나오며 폭발적 에너지와 굉음을 내기 시작하였다. 겉으로는 서양 옷을 입었지만, 우리 문화와 전통의 내적인 정서는 그것과 같이 공명하지 못했다. 한민족 고유의 문화와 독립의 의미는 친일부역 행위자들의 복권으로 퇴색하였으며, 민주주의라는 형평의 개념은 군사독재라는 편중된 가치관에 의해서 통제되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기대할 수 있는, 개화된 민초들의 희망이라는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더 높고 안정된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의무감이었고, 그 높은 곳에는 예술가도, 스포츠인도, 장사꾼도 아닌 의사, 변호사, 판검사들이라 불리는 바로 그 권력집단, 20세기판 양반가들의 카르텔이 선점하고 있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이라고 생각한다.




2. 불안심리가 만들어낸 기형적 육아관

  육체노동을 하는 상공업이나 기술직을 천대하는 문화는 책상에 앉아서 펜을 굴리거나 키보드를 두드려대는 화이트 컬러나 관리자의 모습을 우상화하는데 일조하였다. 이는 거꾸로 말해서, 육체노동을 한다는 것은 오래전 쌍놈, 혹은 상놈이라고 불리던 상인, 천민, 노비들이 하던 일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멸시받고 천한 직업이라는 고정관념을 강화한 꼴이 된다. 결국 그러한 가치관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반대편으로 몰리게 하였고, 그 극단의 끝에 바로 그 독점적 엘리트 집단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독점적 엘리트 집단을 비롯한 속칭 그 선비 집단에 들어가려면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과의 경쟁을 통해서 선두를 달려야 한다. 선두를 달려야 하는 이유는 대학교 입학 때문이며, 명패가 좋은 대학을 나오면 그간 우리나라에서는 나름대로 인정받았고 남보다 편하게 취직이 되었으며, 보다 쉽고 편하게 출세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인정하는 좋은 대학에 입학하려면 중고등학생 때부터 무언가 실생활적으로 배우고 학습을 쌓는 것이 아닌, 오로지 남들과 경쟁을 해서 이기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 대학 입학에 필요한 점수는 고등학교 시험 점수이고, 고등학교 시험 점수라는 것은 해당 과목 자체의 순수한 성취와 절대적인 평가가 아닌, 상대방과의 순위 경쟁을 통해서 상대적으로 결정되는 것을 말한다. 그 경쟁이라는 것은 체육활동도 아니고, 피아노도 아니고, 봉사활동이나 예술활동, 혹은 게임도 아니다. 오로지 책상에 앉아서 책을 보고, 책상에 앉아서 글을 읽고, 책상에 앉아서 문제를 잘 푸는 기술을 배가시키는 능력을 말한다. 이것은 문득 지난 시절, 우리 선조들의 과거시험을 떠오르게 한다. 평생 일 한번 해본 적이 없어 손과 발은 희고 차가우며, 뼈는 말랑말랑해져서 조랑말에서 떨어져도 오히려 다치지 않는다고 하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그 유생들이 집착했던 유명한 시험 말이다. 그것은 실리를 추구하지도 않았고, 현실을 반영하지도 못하였으며, 민의와 국방에 도움이 되지도 못하였다. 그것은, 나라를 운영하는 집단의 구성원들이 한낱 화선지 위에 쓰인 속담과 경구의 화려함 만으로 평가되고 등용되는 선비적 허세의 일부가 아니었던가. 조선시대에 성공을 하려면 과거에 급제해야 했고, 과거에 급제하려면 좋은 선생을 만나서 가르침을 받아야 했고, 집안에서는 그 남성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으며, 아내의 경우에는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공부하는 남편을 위해서 헌신해야 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성공을 하려면 대학에 입학해야 하고, 대학에 입학하려면 좋은 과외선생과 학원을 만나서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집안에서는 그 아이들 뒷바라지를 해야 하며, 엄마의 경우에는 커리어를 포기하는 일이 있어도 공부하는 자녀를 위해서 헌신해야 한다. 분단 이후, 혹은 그보다 먼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이 악몽의 연결고리. 이것은 1970년대를 지나 1980년대에서도 지속되었고, 가정의 형편들이 좋아져서 대학 등록금을 감당하기 쉬워진 1990년대 극에 달했다. 대대로 가난했던 집안에서는 자녀에게 끔찍한 가난과 고통의 유산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 모든 재산을 자녀의 교육과 대학 입학에 쏟아부었고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꿈, 가난 때문에 멸시받고 누리지 못했던 것을 아이가 이루어주기만 한다면,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명문대학에 보내야 하는 그 회한의 운명이 저주스럽지는 않았다고 자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부나 지자체, 각 학교에서는 솜씨 좋은 언변으로 아무리 봉사활동의 중요성을 외치고, 다양한 예체능 점수를 부여하는 시스템을 마련할 것이라 주장해도, 여전히 우리나라의 고등학생들은 '국영수'라고 불리는 광신적 교과과목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과목의 점수가 대학 진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학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급식이나 교복 지원을 받아가며 골고루 학교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있지만, 이와는 별개로 사교육이나 학원교육을 받지 않는 학생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의무교육이라는 것은 여전히 빈 껍데기 신세가 되어있다. 평생 한번 외국인과 영어 한마디 제대로 나눠볼 일이 없을 법한 대부분의 학생들이 우리말도 서툰 유치원 때부터 영어교육을 받는다. 유치원은 교육내용에 영어교육을 집어넣지 않으면 학부모로부터 항의를 받는다고 한다. 학생들로 하여금 우리 선조들의 아름다운 문학작품을 알게 한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국어과목의 한국문학이라는 부분도, 단순히 그 작품의 감상이라든지 인문학적 간접체험은 이루어지지 않고, 오로지 4지선다형의 문제 속에서 작가 자신과 독자들도 모르는 그 '주제'를 고르라는 식의 강압적 테스트만으로 변질되었다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예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려면 그 이전에 부모들은 서둘러 아이들이 한글을 깨치도록 별 짓을 다해야 한다. 학교는 더 이상 한글을 배우는 곳이 아닌 한글을 이미 배운 아이들을 테스트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초등학생들은 졸업하기 전 너나 할 것 없이 중학 수학과 영어과목을 소화하기 위해서, 미리 수학학원과 영어학원을 다녀야 한다. 오히려 사교육이 더욱 절실했을법한 그 오래전 학력고사 시절의 80-90년대와 비교해볼 때, 지금의 사교육 시장이라는 것은 가늠할 수도 없이 많아졌다. 직업의 귀천이 사라졌다고 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시대라고도 하고, 첨단 IT강국의 선진 민주화 국가라고 자부하는 이 나라에서, 중고등학교 자녀를 둔 부모의 한 달 지출비의 대부분이 자녀의 사교육을 위해서 허비된다고 하니, 도대체 사교육은 왜 필요한 것이고 무엇을 위한 것이고 얼마만큼의 효과가 있는 것인지 누군가 명확히 대답해줄 사람을 찾고 싶은 심정이다. 이러니 오히려 우리는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지 않겠는가.




3. 자녀를 통해서 치유하고 싶은 부모의 유년시절 트라우마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우리나라 국민들의 통념이라고 한다면, 사람이 행복해지는 기준이라는 것은 무조건 좋은 대학을 나오고, 평생 동안 다닐 수 있는 안정된 직장에 취직하여 입신양명하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었다. 즉, 인생의 행복이라는 것이 자신의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성취감이나 만족이 아닌, 겉으로 보이고 타인을 위해서 행해야만하는 형식적인 출세와 성공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아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학교 공부에는 소질이 없어 보이고, 시험을 치르는 행위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부모는 그 아이의 다른 적성을 찾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한다. 혹시 아 아이가 피아노에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닌지, 혹시 축구에 소질이 있는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하며 어려서부터 아이에게 다양한 경험을 시키기 위해서 노력한다. 최근에는 골프 붐이 일어났기 때문인지, 골프연습장에 어린아이를 데리고 오는 부모가 많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주목할만한 것은 대부분 엄마가 아이를 데려온다는 것이다. 골프를 시키건, 축구를 시키건, 피아노를 시키건, 태권도를 시키건, 아이 옆에는 항상 부모-특히 대부분 엄마가 아이의 아바타가 되어있다. 선생이 아이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면 그 옆에서 아이의 엄마가 대신 대답을 해준다. 지난주에 연습은 많이 했는지, 느낌은 어땠는지, 실력이 느는 것 같은지, 앞으로 계속하고 싶은지 선생이 물어보면 마치 아이의 영혼을 엄마가 흡수한 것처럼 엄마는 자녀로 빙의하여 대신 대답하고 상담하고 결정한다. 그러면 그 당사자인 아이는 옆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멀뚱멀뚱 둘의 관계만 지켜보며 자신의 위치를 가늠한다. 나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것이구나. 나는 엄마를 위해서 이 것을 해야 하는 것이구나. 피아노 콩쿠르에서 성적이 안 나오고, 축구에서 골을 넣지 못하고, 시험에서 90점 이하가 되었다면 아이는 스스로 자신을 평가하고 생각하기 이전에, 엄마 혹은 부모의 얼굴을 떠올리며 혼이 날까 봐 혹은 실망시킬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스스로를 비하하고 자책하기에 이른다. 본인 자신의 냉정한 평가를 내릴 기회는 완전히 상실한 채 말이다. 즉, 공부이건 예술이건, 체육이건, 기술이건 아이는 여전히 자신이 스스로 원해서 성취하고 싶은 것이 아닌, 아직도 여전히 부모의 만족을 위해서 대신 그 꿈을 이행해줘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고 말해도 그 누가 강하게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래도 어린 자녀들을 집에서 오랜 시간 동안 마주하는 역할은 아직도 대부분 여성이 담당하고 있는 만큼, 여성의 가정 내 역할과 사회적 입지를 고려해볼 때, 우리나라의 여성인권이라는 것은 그 변화의 시기가 짧고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여러 곳에서 아직도 진통을 일으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수 백 년, 아니 수 천년 동안 지속된 여성차별과 억압의 역사와 문화가 불과 10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변화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딸과 아들을 구별하지 않고 자녀를 낳고 있는 것이고, 대부분 어려서부터 차별 없이 키우고 있다고 외치고는 있지만, 바로 그 윗세대 흔히 82년생 김지영으로 대표되는, 군사정권 시대에 출생한 여성들까지도 가부장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학교를 다니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한 경우가 많다. 어려서부터 아들과 구별되어 차별당하고 살아온 그 여성들은 지금은 촛불 혁명의 주요 세대가 되어 사회 곳곳에서 인권신장의 변혁을 일으키고 구습을 타파하는 운동을 펼치고 있지만, 그 이면과 구석진 곳에서는 여전히 억눌린 분노와 차별의 아픔을 상쇄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2세에게 보다 많은 기대를 하고, 마치 자신의 2세가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하면 행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즉 '행복'과 '성공'이라는 단어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볼 일이다. 자녀를 키우는 많은 부모들의 카톡 프로필 사진에 부모들 각자의 삶이 아닌, 자녀들의 각종 상장들과 남들보다 우세한 성장 흔적의 사진이 도배되어 있고, 마치 자녀의 성공이 자녀의 행복으로 곧장 연결될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오히려 부모 자신들의 욕망과 행복을 위해서 자녀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시간도 필요하지 않을까.




4. 악순환은 달리는 열차처럼 강하고 단단하다.

  상대방이 먼저 잘못했기 때문에 내가 화를 낸다는 식의 논리를 악순환의 논리라고 한다. 당신이 나에게 먼저 잘못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악순환의 논리이다. 그러한 생각과 대화는 끝을 낼 수 없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식의 대화는 꼬리를 물고 늘어지며 순환된다. 서로 계속해서 상대방의 잘못만 들추어내기 때문이다. 반면, 선순환의 논리는 그와 반대이다. 내가 먼저 양보하고 개선해야 상대방이 따라온다는 논리이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상대방도 변하지 않는다는 인식이다. 내가 먼저 선행을 하고, 본보기를 보이면 그것에 영향을 받는 상대방이나 다른 사람들이 영향을 받고 성장한다는 뜻이다. 그러한 행동이나 대화는 꼬리의 꼬리를 물고 선행을 낳는다. 그것을 선순환이라고 한다.


  우리가 짧은 기간에 개화를 맞이하고, 식민지배를 당하고, 전쟁으로 분단이 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너무 많은 악순환을 만들어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잔재는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정권이 정직하지 못하니 나도 올바르게 살 필요가 없다는 체념. 다른 아이가 나보다 성적을 잘 받았으니, 내가 꼭 이겨야 한다는 강박증. 내가 차별을 받고 살았으니, 나의 아이는 성공시켜야 한다는 보상심리. 상대 진영에서 우리 정당에 피해를 주었으니, 힘을 가지게 되면 반드시 응징해야 한다는 보복심리. 이러한 논리들을 속살을 자세히 들여다보라, 그 속에 과연 인간의 진실한 행복과, 국민의 안위와, 사회정의가 끼어들 자리가 있을까. 그 누구든 보기 좋은 모토를 구실 삼아, 자신들의 이기심과 아집과 교만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타인을 속이고 눈 가리고 폭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사회가 아직도 상인과 기술자와 예능인을 천대시하기 때문에, 내 아이만은 선비로 키워야 한다는 악습의 굴레를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이 사회가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을 우습게 여기기 때문에, 나의 아이만은 억지로라도 여느 대학이라도 나오도록 해야 한다는 악순환의 열차를 올라타고 있지 않은가.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돌리는 작업은 쉽지 않다. 그것은 일방향으로 달리는 기차를 반대편으로 가도록 하기 위해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아가는 열차 바퀴를 멈춰 세워고 그 반대로 회전시키려는 시도와 동일하다. 그러한 시도는 많은 상처를 내고, 많은 피를 요구한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상처 치유도 필요할 것이다. 그 행동을 반대하는 사람도 설득해야 하고, 열차를 다시 설계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 달리는 열차의 바퀴에 아주 작은 제동만이라도 걸 수 있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건 그 열차는 결국 멈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면 그 시간에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그 거대한 열차를 반대로 밀 수 있고, 지금까지 잘못 가던 방향을 되돌려놓을 수 있다. 악순환의 가치와는 반대로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든, 내가 스스로 행복하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면 거리의 환경미화원이라는 직업도 사람들에게 대우받을 것이다. 꽃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 기름으로 떡칠이 된 기계를 좋아하는 사람, 컴퓨터를 코드만 봐도 열광하는 사람, 타인을 도와주는 것에 유난히 흥이 난 사람, 유리창을 닦으면 미칠듯한 정화의 기쁨을 느끼는 사람, 물이 새고, 녹슬고 깨진 배관을 수리하면서 그 속으로 흐르는 물의 흐름에 자신의 리듬을 싣는 사람. 그들은 모두 원예사, 정비사, 프로그래머, 자원봉사자, 청소 대행사, 배관공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그 누구와도 수치로 비교할 수 없는, 고유의 가치를 갖는 직업군들인 것이다. 이 사회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나 자신의 준법기준을 세워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보편적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되면 법을 지키지 않는 타인을 탓할 필요가 없어진다. 본인이 진정으로 노래 부르는 것이 즐겁고 춤 주는 것이 행복해서 무명가수의 기간을 기꺼이 감내할 에너지만 갖고 있다면, 수년간 고시원에서 공부해가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막연한 노후에 대한 불안 때문에 억지로 9급 공무원에 합격한 명문대 졸업생보다 값진 인생을 살 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인류 역사의 그 어떠한 혁명이라도, 그 어떠한 변화의 물살이라도 그 모든 전환의 시초는 단 한 번의 미세한 제동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5. 열차가 멈춘 후의 단상

  어느 날, 그 악몽 같은 열차의 맹목적 전진이 멈춘 날을 상상해본다. 그때에는 나의 아이들을 밤새도록 책상머리에 앉혀서 학생 필독서라 명명된 따분한 고전소설들을 억지로 읽게 하는 대신 가족끼리 재미난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으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낼 것이다. 아이들을 기출문제집 속에 파묻히게 하여 점수를 얻어내는 기술만 쌓아가도록 사육하는 대신, 10월에는 떨어지는 낙엽을 서로 가로채기 위해서 즐겁게 달려가고, 12월에는 첫눈을 밟아보는 기쁨을 얻기 위해서 기꺼이 외출할 것이다. 아이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그것이 너의 삶을 지탱해주고 필요하면 너의 생계도 해결해주리라는 자신감을 가르쳐준 뒤, 스스로 즐거운 일에 빠져들게 하고 최선을 다하며, 책임지고 후회하지 않도록 조언해줄 것이다. 훗날, 아이가 생계 때문에 힘들어한다면 네가 좋아하는 일이 너의 생계를 충당할 수 있도록 더욱더 좋아하고 미치라고 응원해줄 것이다. 아이에게 책을 읽게 하고 싶다면, 내가 책에 빠져드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해서 아이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할 것이며, 아이가 공부를 하도록 만들고 싶다면 거꾸로 내가 어떠한 분야에 몰두하여 그것이 아름다워 보이고 멋있어 보이도록 할 것이다. 고양이를 물가로 데려갈 수는 있지만,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다. 고양이에게 물을 먹이고 싶다면, 목이 마르도록 같이 열심히 뛰고 놀아주면서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것이 최선이다. 고양이는 누군가 억지로 먹여주는 물이 아니라, 스스로 갈증이 나서 먹는 물이 가장 맛있다는 것을 비로소 느낄 것이다. 그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때 비로소 고양이는 독립할 수 있다.


  내가 언급한 것들은 고정관념일 수도, 혹은 일부분일  있다. 삶의 곳곳에서 우리는 변화를 맞이하고 있고,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가정들과 부모, 아이들이 구습을 타파하고 깨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누군가는 억지로 대학을 가고 싶어하지 않을 수도 있고, 보란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재미있고 행복하게  수도 있다. 원하면 걸그룹 오디션을 보러  자유도 생겼고, 집으로 변기를 고치러 오는 사람이나   수거를 하러 오는 사람을 무시하고 천대하는 것도 사라져 가는  같다. 아파트 공사장에서 잡부일을 하는 사람들도 퇴근할 때에는 멋진 수입 외제차를 타고 자기만의 여가를 누리러 떠난다. 드물기는 하지만, 알게 모르게 우리가 천대시했던 우리의 고정관념, 악습들이 하나하나 깨어지고 부수어지는 것을 목격하기도 한다. 이런 말을 하기에는 부끄럽지만, 나는 아직도 아이돌 그룹의 일원이 되고 싶어서 열심히 춤을 추고, 안무를 따라 하는 어린이들의 미래를 불안해한다. 아직은 철이 없어서 겉멋이 들어간 허세로 젖어있다는 협박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겉으로는 정의와 세련됨과 모던함과 깨어있음을 외치고 있지만, 나의 잠재된 의식  밑바탕에는 위에서 말한  선비 의식과, 대리만족과, 허영과 자만심이 가득 쌓여있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그래도 하나의 밀알 같은 희망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나의 아이가 스스로 원해서  어떠한 종류의 무언가에라도 완전히 미쳐있는  눈동자를 목격했을 , 나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발견한다는 점이다.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가졌던 각인, 공포심과 그 트라우마. 이것이 치유되고 새로운 의식으로 발현되고, 창조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기를 희망한다. 지금껏 우리가 그렇게 열정적으로 발전해왔던 것처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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