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하프타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lverback Mar 04. 2022

비 온 후 갬

  한 여름의 소나기는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준다. 그래서 나는 소나기를 참 좋아한다. 갑작스레 내리는 비는 땅을 촉촉하게 하고, 먼지를 청소한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마치 세안 후 건조한 피부에 수분 토너를 발라주듯, 비라는 것은 땅이 잃어버린 수분을 되돌려준다는 회복의 감정이 있는 것이다.


  집안 거실에서 빈둥거리다가, 느닷없이 천둥이라도 칠 때면 나는 어김없이 커다란 우산을 들고, 반바지와 슬리퍼 차림으로 곧장 달려 나간다. 집 근처 작은 개천이 있어서, 장마 때가 되면, 불어난 물이 웅장한 소리와 커다란 형상을 내보이며 흘러가는 것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아내는 꼭 옛날 미친 사람들이 비가 오면 밖으로 달려 나갔더라고 놀려대지만, 나는 적어도 나체로 뛰어나가지는 않는다고 항변하고는 한다.


  뭐 어찌 되었건, 폭우나 소나기는 맥없이 보슬보슬 내리는 비와는 전혀 다른 감정을 갖게 하는 것 같다. 이유인 즉, 많은 양의 비가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은 그 질량이 느껴지지 않은 일종의 안개 같은 희미함이라기보다는, 마치 태평양의 정어리 때처럼 군데군데 수분들이 무리 지어서 바람에 밀려 나부끼는 것을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알 수 없는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우리가 허공으로 인식하고 살아가던 부분에 이렇게 많은 힘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소나기가 내릴 때 알아챌 수 있는 것이다.


  빗방울들이 바닥이나 개천에 떨어지는 소리는 우리가 평소 일상에서 듣고 살던 소음과는 다른 주파수를 가진다. 그것은 강하돼 시끄럽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되 비정형적이다. 그래서 언어를 잘 구사하는 작가나 만화가들의 표현을 보면 대부분 빗방울 소리를 '파파파팍'이나 '타다다탁'이 아닌, '후두두둑' 이라든지 '똥또도동' 혹은 '촤아~' 같은 리듬감 있는 표현을 쓴다. 마치 다이버가 파문 없이 잠수하듯, 빗방울이라는 것이 지구 표면으로 의젓하게 파고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비 오는 날을 좋아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아마도 사진에 관심을 갖고 나서였을 것이다. 비가 그친 직후의 세상이라는 것은, 탁하고 흐릿했던 표면들에 수분이 덧입혀져서 가시광선의 반사를 한번 걸러주기 때문에 세상의 색채가 보다 진해지고 깊어진다. 명도는 내려가지만, 채도는 올라간다. 그래서 식물들은 더욱 푸르게 보이고, 하늘은 더욱 파랗게 보이며, 아스팔트와 건물 외벽, 표지판과 각종 간판들까지도 원색적이고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디지털이건 필름이건, 비 갠 직후에 풍경사진을 찍어보면 평소와는 확연하게 다른 색채감을 느낄 수가 있게 된다.


  비는 이 세상의 색상과 소리뿐만 아니라, 냄새까지도 풍요하게 한다. 김훈 작가는 '비'의 후각적 영향력에 대해서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절묘한 표현을 한다.


'비는 살아있는 것들 속에 숨어있던 냄새를 밖으로 우려내서 번지게 한다'

  

  비는 이 세상의 흙냄새와 풀냄새와 먼지 냄새, 그리고 비릿한 공기 냄새를 모두 가지고 있다. 언젠가 우리 딸이 아주 어릴 때, 온몸이 흠뻑 젖도록 뛰어놀고 집으로 들어올 때의 생생한 냄새가 그러한 것이었다. 특히 비 내리기 직전,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면서 대기의 습도가 급격하게 높아지는 순간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마치 땅바닥 속에서 누군가가 지층의 흙을 솎아내어 그 냄새를 지상으로 퍼뜨리는 것 같은 상상을 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감각적인 부분이 크다고 할지라도, 비의 가장 강력한 기능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지구 표면에 붙어서 살아가는 다양한 생명체들에게 생명을 공급한다는 부분일 것이다. 비, 곧 물이라고 하는 것은 형상이 없고 자유롭다. 그래서 각이 진 곳이건 둥근 곳이건 가리지 않고 파고들고 스며든다. 푸석했던 나무줄기는 푸른 새싹을 만들어내고, 갈라진 땅은 비옥한 토양으로 변신한다. 온갖 새들은 비 때문에 몸을 숨겨야 하겠지만, 비가 없다면 땅 속에 숨어있던 먹이도 얻지 못할 것이다. 오리들은 불어난 개천에서 흘러 내려오는 자잘한 물고기들을 찾아내느라 정신이 없고, 비가 그친 직후에는 평소 안보이던 왜가리가 백로도 물속의 먹이를 찾아 어디선가 날아든다.


  어느 여름날,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진다면 주저하지 말고 종아리를 걷은 후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채, 커다란 우산을 들고나가보라. 1평방 미터가 채 안 되는 공간이 그 어느 곳보다 아늑하게 여겨질 것이다. 세상은 평소 드러내지 않았던 싱그러운 냄새를 선사할 것이고, 귀와 눈은 해소의 감정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비가 그치면, 작은 아이들과 연인을 불러내어 사뿐하게 걸어가는 뒷모습의 사진을 찍어보라. 한층 짙어진 채도의 세상을 배경으로 한채 마치 그 속에서 피어난 튤립처럼 당신의 사랑은 선명할 것이다.


비는 선물이다. 하지만, 비 갠 직후는 축복이다.

올여름의 기약 모를 소나기를 기대하면서.....


끝.




매거진의 이전글 구습(舊習)의 악순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