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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Jan 06. 2022

잘해주면 기어오른다

  인생 절반 살다 보니 늘어가는 것은 뱃살이요 쌓이는 것은 고집이기는 한데, 나름대로 내 안에 있는 자의식의 양분이 쌓이고 세상을 마주하는 주관과 가치관이 자리를 잡아가는 것을 느끼지만, 말이 좋아서 그렇지 사람들은 그것을 '아재' 혹은 '꼰대'라는 짧고 귀찮은 단어로 표현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는 요즘이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건, 아는 사람을 만나건, 가족 친지를 만나건, 친구를 만나건, 친구의 친구를 만나건, 직장 선후배를 만나건, 혹은 협력업체를 만나건 나는 나 자신을 최대한 정중하고 겸손하게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나쁘게 말하면 소극적인 것이고, 좋게 말하면 에티켓에 충실한 것인데, 겉으로 드러나는 나를 표현하자면 외모적으로 큰 혐오감은 없다고 느껴지는 바, 일단 단어 선택에 매우 신중하기도 하고 목소리 톤을 신경써서 조절하는 편이어서 나를 대하는 사람들이 저 정도면 그래도 피해야할 사람은 아니라고 느낄 정도로 제스처와 억양과 표정과 기척 등을 적절하게 관리한다고 자부하기는 하는데, 그래도 사람은 각양각색이라 오롯하게 느끼는 사람이 받아들이는 것에 맡겨야 하는 부분도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런데, 왜 가만 보면 그러한 사람들이 있다. 광역버스를 타도 내 옆자리에 누군가 앉을 사람이 있을까봐 그 자리에 가방이나 옷가지를 두지 않고 온전하게 그 자리를 비워놓는 사람.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고 굳이 요청받지 않았는데도 꼭 그 컵을 카운터에 갖다 주고 잘 마셨다고 먼저 말하는 사람. 주점에서 술이라도 한잔 할 때, 웬 걸인이 들어와서 구걸이라도 한다면 주변의 불편을 무마하기 위해서 나서서 몇 천원 쥐어주는 사람. 편의점에서 바나나 우유라도 하나 사 먹고 나서 빨대에서 나온 작은 비닐을 어디 버리지 못해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가 기어코 집에 와서 쓰레기통에 버리는 사람. 버거킹에서 햄버거를 먹다가 테이블에 케첩이라도 묻거나 참깨 방울이라도 몇 개 떨어지면 뒷사람에 대한 막연한 걱정 때문에 냅킨을 가져와 그런대로 슥슥 문질러 정리하는 사람. 흔한 말로, 쓸데없이 다른 사람 생각해서 사서 고생하는 사람. 혹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공중도덕이나 준법정신을 지켜가며 자기만족하는 사람. 큰 돈을 벌지도 못하고, 타인의 주목을 받지도 못하며, 그저 나 하나의 몸뚱이를 건사하며 꾸역꾸역 하루의 일상을 감당하고 그나마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도, 손을 벌리지도 않았다는 안도감에 오늘 하루를 감사하며 웃으며 이불속으로 들어가는 소시민. 그런데 그러한 얼간이가 바로 나다.


  이러한 사람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다. 타인에게 웃으며 대해주고, 에티켓을 지켜주고, 내가 피해를 보지 않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배려를 해주는 사람을 무시하고 쉽게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그것이 나이의 문제인지, 아니면 성격의 문제인지 아니면 체격과 인상의 문제인지 잘 알 수 없지만, 거리가 조금 좁혀 들었다고 해서 아무런 예고 없이 함부로 나의 아담하고 개인적이고 단단한 내면의 요새에 쳐들어와서 비아냥거리고 허세를 잡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개인적으로 나는 매우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사람이라고 느끼고 있지만, 한번 안면을 트고 어느 정도 경계심이 풀릴 정도가 되면 편견 없이 그 사람을 대하고 나의 속 이야기도 거리낌 없이 주고받는 것을 좋아하여 한마디로 '쉽게 친해지는' 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렸을 때에는 잘 몰랐으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와의 거리를 좁혀오는 사람들에게 대하는 나의 태도가 예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지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오래전에는 나와의 거리를 급속도로 줄이려는 사람들의 명암을 같이 껴안고 살았다고 한다면, 최근 들어서는 그렇지 않다는 말. 다시 한번 쉽게 말해서, 이제는 조금 친해졌다고 해서 나를 쉽게 대하고 깔보고 간 보고 올라타는 사람들에 대해서 아무런 후회 없이 이별을 고할 수 있는 지경이 되었다는 뜻이다. 


  최근에도 아니나 다를까, 협력사와 일을 하다가 상대방 측에서 먼저 요구하지도 않았던 배려를 기꺼이 해주다가 그쪽으로부터 난데없이 서운한 말을 들은 경우가 있어서, 정중하고도 차가우며, 예의를 갖추면서도 잔인하게 관계차단을 선언하고 잠수를 탔더니 회사에서 난리가 났더랬다. 예전에는 이것이 불편했는데, 이제는 이것이 그렇게 통쾌하고 편리할 수가 없다. 주변에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이 죄다 몰려들어 난국을 풀기 위해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아주 재미있었고, 또한 그러한 과정이 그들에게 장기적으로는 크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상황에서는 본인이 그 장소, 그 시간, 그 프로젝트에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과, 대체할만한 인력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커리어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다. 나는 비록 인재나 대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의 진로에서 어느 정도 경력을 쌓았고 - 물론 타인이 그 일을 할 수도 있지만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컬러를 드러내는 데에 집착했던 스타일이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소란은 나의 편리대로 해결이 될 수 있었음을 고백한다.


  21세기가 훨씬 지나고 있는 한국은 아직 이름 모를 병폐가 많이 쌓여있다. 그중에 '잘해주면 기어오르는' 버릇은 아직도 사회 곳곳에 남아있다. 이것은 회사에서도 존재하고, 가정에서도 존재하고, 학교에서도 존재하고, 관공서에서도 존재한다. 자신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자신의 내면을 만들고, 진로와 커리어를 아주 단단하게 하여 그러한 악습에 대항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유야무야 넘어가면 안 된다. 상대방도 힘들고 나도 힘들다. 


  어항 속의 작은 복어는 언제 봐도 귀엽다. 하지만, 상어조차도 복어는 함부로 삼킬 수 없다. 치명적이고 정확하며 단단한 독이 있는 한.




2022년 새해부터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인간들에 대한 환멸을 맥주로 집어삼키며, 술김에 잡설을 써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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