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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Feb 10. 2022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태어나서 제대로 된 인문학 강의를 들어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대학시절, 내로라하는 대학교수님의 문학 강의라는 것들도 틀에 박힌 듯했고, 하물며 입시 준비를 하면서 강제로 공부해야했던 중고등학교 시절이라는 것은 말해 무엇하랴. 그것은 어떠한 생각이나 가치관이라는 개념보다도, 종이에 인쇄된 글자를 눈으로 읽어내야 하는 그 압박감과 피로감이 우선했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문학이라는 개념을 대할 때 사람의 생각이라든지 고민 혹은 독특한 시각이라는 정신적 가치보다도, 두꺼운 표지와 검은색 잉크로 자잘하게 채워진 종이로 상징되는 물질적 도구를 떠올리는 법을 배웠다. 이것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소모적이고 비극적인 낭비의 시간들이었는지 나이가 들어서, 혼자 스스로 소설책을 좋아하게 된 이후에 깨닫게 되었다.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는 아이폰이 세상에 등장하고 난 직후, 사람들 개개인이 자유롭게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하고 방송할 수 있음으로 해서, 전 세계 그 누구든지 자신이 원하는 부류의 방송을, 원하는 시간에, 그것도 원하는 챕터만 골라서 들을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진 2010년에 시작되었다. 김영하 작가가 그때부터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은 아니었고(문학이라는 장르가 워낙에 대중매체와는 거리가 있다 보니),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2016)이 개봉하고, 이후 곧바로 TV 예능에 몇 번 출연하고 난 이후부터 폭발적인 유명세를 얻게 된 듯한데, 물론 그는 대중에게 알려지기 이전부터 한국 문단의 여러 상을 휩쓸며 주목받는 젊은 작가로 일찌감치 부상한 뒤였지만  영화나 TV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에서 문인이 쉽게 대중들의 사랑을 받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내가 김영하 작가의 팟캐스트를 접하게 된 계기는 우연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2013년부터 조깅을 시작했으며, 1시간 정도 열심히 달리는 동안 나의 귀를 채워줄 장치가 필요했고 그것이 팟캐스트였다. 당시는 팟캐스트 전성기였기 때문에 여러 재능꾼들의 팟캐스트가 유행을 했었는데, 일주일에 3번 정도 규칙적으로 달렸으니 근 5년간 내가 열심히 조깅하면서 들었던 팟캐스트는 그 양을 헤아리기 힘들다. 그렇게 열심히 나의 종아리와 심장을 혹사시켜가며 그 고통을 잊기 위해서 집중했던 팟캐스트의 세계는, 나에게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작가와의 만남을 주선해 준 것이다. 


  김영하 작가의 팟캐스트는 일종의 명작 소개 방송이다. 수 세기에 걸쳐서 인류에게 커다란 울림을 준 세계적인 작품부터 우리가 알지 못했던 국내의 여러 작품들을 다루고 있으며, 덧붙여 독자로서의 감상이라든지, 작품과 해당 작가에 대한 배경지식, 사건, 기사, 약력 혹은 소문 같은 것들을 세밀하고도 자유롭게 언급한다. 단 1시간이 안 되는 시간, 김영하 작가가 다루는 작품들과 인물들과 배경지식들과 감상들은 그 어떠한 외부세계의 간섭도 받지 않은 채, 캐스터의 내밀한 공간 - 즉, 자기만의 작은 골방 속 테이블 위에 놓인 노트북과 마이크 앞에서 빛을 발한다. 오로지 발화자의 마이크와 청취자 개개인의 작은 이이폰 케이블로 연결되는 이 작은 소통은, 아주 독립적이고, 요원해 보이며, 막상 사람들의 실생활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은밀함으로 무장한 채 이것이 진정한 인문학이라고 호기심을 가져볼 만한 비밀상자의 뚜껑을 열어 보이는 것이다. 


  나는, 아니 우리는... 이러한 것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마치 1~2년 먼저 입학한 형과 누나가 나의 손을 잡고 다니면서 학교의 구석구석을 설명해주는 친절함과도 같이, 혹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 외딴 나라에서 그들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해설해주고 나의 생각을 전달해주는 통역사와도 같이, 물질과 효용이 뒤덮은 이 각박한 세상을 조용히 움직이고 있는 위대한 사상가들의 언어와 생각을 하나하나 음미해보며 그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 그 어떠한 형식과 규칙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해석하는, 그 성실하고 자유로운 노력. 그리하여 문학이라는 분야를, 검은색 잉크로 표현된 '글' 혹은 입시를 위해서 암기해야 하는 '과제'같은 것이 아닌, 우리 개개인들의 삶이 특정한 시기를 거치면서 다양하고 독특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고, 지구촌 곳곳에서 사람들이 제각각 창의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 그대로 인간의 삶 그 자체를 다루는 그야말로 '인문학(人文學)'이라는 것으로 느낄 수 있게끔 해주지 않는가. 학창 시절, 억지로 억지로 머릿속으로 집어넣으려고 했던 김유정의 동백꽃도,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도 더 이상, 내가 아는 동백꽃이 아니었고 흔히 알고 있었던 돈키호테가 아니었다.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붉은 꽃이 아닌 풋풋한 사랑과 순수의 상징이었으며, 그것은 더 이상 동화 속 멍청한 기사가 아닌,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고통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한 수준 높은 해학과 풍자였던 것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들을 평가하는 미시마 유키오의 문장력, 혹은 장 그르니에를 칭송하는 알베르 카뮈의 추천문은 그 얼마나 품위가 있었던가. 카프카라는 인물이 누구와 관계를 맺으며 살았고, 그의 작품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겪었던 그 우여곡절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행운이었던가. 박완서 선생의 '그리움을 위하여'가 결국 수다의 논법으로 전개되고 그 질곡의 인생이 언어와 함께 마침내 달음박질할 때, 우리는 왜 '위대한 게츠비'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상기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어린아이처럼 소설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싶어 하는 가수 '이적'과, 깊고도 날카로운 시선을 보여준 가수 '이이언'의 나레이션은 나로 하여금 마치 옆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대고 엿듣고 싶어 하는 호기심을 어찌 불러일으키지 않았겠는가. 평소 좋아했던 레이먼드 카버를 위해 커다란 침대를 마련했다고 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화는 작가와 작품 모두 우리 인간들의 생활이 소설 작품과 큰 경계를 두지 않는 하나의 커다란 인생의 굴레를 이루면서 산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마치 산사태가 일어나기 직전 불안하고 고요한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서 보도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존 크라카우어의 수준 높은 보고서는 문학이라는 장르가 그 구속됨 없이 여러 가지 필법의 형태로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과 감동을 준다는 것도 일깨워준다. 


  김영하 작가가 소개하는 작품들과 인물들은 다양하다. 그래서 작품 이외의 작가를 둘러싼 인맥들과 그 주변 이야기들도 풍부하다. 하나의 작품과 작가를 이해하고, 그 작가가 좋아했던 또 다른 작가, 혹은 그 작품에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작품 같은 것들이 거미줄처럼 연결된다. 호기심을 가지고 하나의 작품에서 출발하여도 우리는 끊임없이 관계되고 이어지는 수많은 명작들을 줄줄이 접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팟캐스트는 여러 인문학을 다루는 하나의 고유한 인문학으로 인정해도 무방하다. 우리가 한 번도 체험해보지 못한 방식 - 주입식 교육과 강제 선택의 의무 독서가 아닌, 호기심에 발견한 하나의 실마리가 그 길고 무성한 뿌리를 서서히 드러내어 그것을 쫓는 사람에게 무한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듯 이 친절한 방송 캐스터의 수사과정은 듣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문학이라는 장르에 관심을 갖게 하는 힘을 내뿜는 것이다. 아주 고요하게, 그러나 아주 강하게.


  다양한 생각과 가치관이 결핍되어 메말라버린 우리의 인문학 정서라는 것이, 한 머리 좋은 작가의 노력으로 인하여 빛을 발하고 수분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우리는 짧은 기간이나마 해적 방송 같은 그 차별된 혜택을 누렸지만, 아쉽게도 이 팟캐스트는 2020년 작가의 개인 사정으로 이제 인터넷에서 사라지고야 말았으니, 우리는 또다시 언제 이러한 행운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아쉬움과 또 다른 기대가 섞인다.

 


  앞으로 이러한 소개꾼, 인문학의 마중물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문인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서도 독자와의 소통에 목마른 사람.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인간의 삶과 관련한 것이라면 어느 것을 가리지 않고 담담하게 소감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 그러한 작품들과 작가들의 이야기들과,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여러 각도와 시선으로 털어놓는 사람. 자유롭고 개방된 시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정밀한 언어를 사용하고 말재주가 있는 사람. 비단 소설이라는 분야에만 갇혀있지 않고 여행, 취미, 예술 등의 분야를 슬쩍슬쩍 건드려보면서 그 세계를 같이 여행하고파 하는 사람. 김훈 같은 작가여도 좋고, 김민기 같은 음악가여도 좋을 것 같다. 육체적 고통을 이겨내고 성취감을 이루려는 전문 산악인도 좋을 것이고, 세상 온갖 사람을 상대해가면서 한 곳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해온 사람의 시각도 신선할 것이다. 사람들의 표를 의식하면서 사는 정치인이나 인기에 연연하는 연예인만 아니면 된다. 자신의 전공과 직업에 깊은 노련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품격 있게 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나는 최근에서야, 이러한 팟캐스트의 부재를 느낀다. 어느 날 여유가 생겨서 일찍 잠자리에 들 무렵이면, 몸을 뒤척이다가 귀에 이어폰을 꼽고 누군가가 설명해주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대한 해설을 들으면서 잠들고 싶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쓴 작가에 대한 루머도 들어보고 싶고, 중국에서 어떻게 루쉰 같은 작가나 나왔는지 그에 대한 해석도 궁금해진다. 쌀쌀하고 피부가 까칠해지는 겨울밤에, 문득 중저음으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해주던 어느 친절한 젊은 작가의 은밀한 골방 속 목소리가 그리워진다. 비록 이 팟캐스트는 이제 더이상 들을 수 없는, 역사 속 사라져버린 일종의 흔적같은 것이 되어버려서 누구에게 추천해주는 것도 의미가 없지만, 우리나라에서 단 한 번도 시도되지 않은 '비공인 문학 선생님의 완벽한 해적방송'으로 기념하기 위하여 기록의 목적으로 포스팅하는 것임을 밝힌다.


  





김영하의 팟캐스트 목록

01 -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02 - 셀린저, 데이브 브루벡

03 - 성석제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04 -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초'

05 - 김영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06 - 장 그르니에 '섬'

07 - 장 그르니에. 폴 발레리

08 - 김 소연 '마음사전'

09 - 안톤 체홉 '공포'

10 - 피에르 바야르

11 - 김영하 '악어'

12 - 폴 오스터 '빨간 공책'

13 - 레이먼드 카버 '뚱보'

14 - 밀로라드 파비치 '카자르 사전'

15 - 로맹 가리 '새벽의 약속'

16 - '위험한 생각들'

17 - 김기택 '소'

18 - 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19 - J. M. 쿳시 '추락'

20 - 정이현 '오늘의 거짓말'

21 - 존 크라카우어 '희박한 공기 속으로'

22 - 프란츠 카프카 '소송' 1

23 - 프란츠 카프카 '소송' 2

24 - 김영하 '검은 꽃'

25 - 로알드 달 '맛'

26 - 폴 오스터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27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28 - 박완서 '그리움을 위하여'

29 - 커트 보네거트 '나라 없는 사람'

30 - 김홍희 '방랑'

31 - 위화 '허삼관 매혈기' 1

32 - 위화 '허삼관 매혈기 2'

33 - 무라카미 류 '달콤한 악마기 내안으로 들어왔다'

34 -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35 - 김영하 '그림자를 판 사나이'

36 - 이탈로 칼비노 '왜 고전을 읽는가'

37 - 윤대녕 '어머니의 수저'

38 - 김영하 '너의 목소리가 들려'

39 -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올리브 키터리지'

40 - 이기호 '원주 통신'

41 - 김종대 '한국의 학교 괴담'

42 - 쓰네미츠 토루 '일본의 도시괴담'

43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젊은 소설가에게 보내는 편지'

44 - 코난 도일 '셜록 홈즈 걸작선'

45 - 피츠 제럴드 '위대한 게츠비'

46 - 다비드 드 브르통의 '걷기 예찬'

47 - 은희경 '태연한 인생'

48 - 앤드루 포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49 - 다니자키 준이치로 '만(卍)'

50 - 호시 신이치 '봇코짱'

51 -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소네치카 1'

52 -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소네치카 2'

53 - 마르셀 에메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54 - 수전 케인 '콰이어트'

55 - 나쓰메 소세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56 -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57 - 미즈무라 미나에 '본격소설'

58 -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59 - 알베르 카뮈 '페스트'

60 - 퍼트피샤 하이스미스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

61 -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62 -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63 - 아모스 오즈 '친구 사이'

64 - 권여선 '이모'

65 - 최은영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66 - 플래너리 오코너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67 - 안톤 체호프 '입맞춤'

호외  '여름 휴가에 가져갈 책들'



PS : 글쓴이는 팟캐스트 파일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구글 검색을 해보면 일부 에피소드는 쉽게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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