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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Feb 22. 2022

돈끼호테 / 세르반테스 / 1605

Don Quijote de la Mancha

  그 누가 돈끼호떼를 단순한 어린이 동화라고 칭했던가. 그 누가 돈끼호떼를 허무맹랑한 TV 만화라고 폄하했던가. 깔깔대고 열심히 뛰어다닐 어린이들이 1500 페이지가 넘는 소설책을 어떻게 전부 감당할 수 있겠으며, 16세기 유럽의 역사와 이베리아 반도에서 거주하던 무어인의 피난 경로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다는 말인가. 중세시대 기사도에 대한 지식과 계급구조에 대한 이해, 인권 및 경제, 문화, 언어, 지역, 종교, 군사, 교육, 직업 그리고 문학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은 그 시대를 증언하는 기록물이자 풍자이며, 역사서이자 장편시이다. 물론 이 작품의 성격상, 주요 스토리의 흐름과 해학을 동화책 형식으로 구성할 수는 있겠지만,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세르반테스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당시 사회상을 도마 위에 드러내어 독자로부터 마음껏 웃고 즐기며 조리할 수 있도록 만든 일종의 기발한 레시피이자 도발적 요리로 봐야 한다. 굳이 동화라는 수식어를 달고 싶다면, 어른용 동화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심미적 알레고리를 떠올리게 하는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들, 시공간의 기묘함을 체험시켜주는 루이스 캐럴의 이야기들, 비극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안데르센의 작품들 속에서 우리는 문학이 가져다주는 환상적이고도 아름다운 이야기의 기능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일상 속 그 자리에 항상 있고, 그 시간 속에 계속 존재하는 그렇고 그러한 것들이 아닌, 거기에 없을 법하고 존재하지 않을 법한 것들이 창의적이고 신선하게 우리를 잡아 끌어당긴다. 마치 꿈을 꾸듯이 날개를 펼 수도 있고, 나보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기꺼이 손을 뻗을 수도 있으며, 불가능한 것이 실현되는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세르반테스의 돈끼호테는 독자를 웃음과 감동이 끊임없이 넘쳐흐르는 상상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중세 기사의 여행기가 아니다. 작가는 소설의 세계에 빠진 한 정신 나간 노인의 행적을 통해서, 그를 마주하는 세계에 대해 다양한 시각을 그려내고 있고, 손가락질당하는 주인공이 바라보는 세계가 과연 그 멀쩡하다는 주변인들과 얼마만큼의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인지, 주인공의 행동과 언어가 그 상황과 사건들 속에서 어떠한 반응을 이끌어내는지를 풍성한 소재를 무수히 나열하여 재미나게 풀어내고 있다. 이는 어찌 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고대 그리스 문학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일종의 희극적 개념 - 말하자면 관객들보다 못나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망가지거나 혹은 출세하는 규칙과도 잘 부합되는 듯하다.


돈끼호테는 싼초에게 그 투구를 들어 올리라고 말했다. 싼초는 세숫대야를 손에 들더니 말했다. "이런, 좋은 세숫대야인데요, 한 은화 1레알 정도 나가겠지만 지금은 1마라베디 값밖에 안 되는 물건인뎁쇼." 그리고 주인에게 그걸 주자 돈끼호테는 그것을 머리에 썼다. 앞과 옆을 어루만져보고 투구 아랫부분을 찾아봤지만 아무 데도 없자 이렇게 말했다. "이 유명한 투구를 처음 쓴 친구는 틀림없이 맞춤으로 이걸 만들어 썼을진대 머리통이 무척 컸던 모양이구먼. 그런데 더 엉망인 것은 반쪽이 없단 말이야." 싼초는 세숫대야를 투구라고 부르자 웃음을 참을 수 없었으나 성질 고약한 나리가 화를 터뜨릴 것을 생각해 터져나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우리는 돈끼호테와 싼초를 보며 그들을 멍청하고 정신이 나갔다고 말할지언정 사악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비록 현실세계에서 벗어나 소설의 공상 속에서 살아가는 노인네일 뿐이더라도 그에게는 그만의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겠다는 이상향이 있고, 약한 자를 구해주어야 한다는 기사의 명예와 사명감이 스며들어 있다. 그리하여 그가 저지르는 실수와 오해와 광기는 자연스럽게 웃음이라는 코드를 생성하고, 연민과 해소의 감정이라는 것과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선과 악의 구도가 아닌, 조롱과 해소를 통한 역설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 소설의 특이한 점은, 수많은 사건과 긴 여정을 통해서 이렇게 엉뚱하고 나약하고 또한 좌충우돌인 캐릭터에게 감정이 생긴다는 점이다. 현실세계의 기준에서 가해지는 체벌과 폭력은 그에게는 일종의 영광의 상처이고, 명예의 증표이다. 그는 갈비뼈가 부러지고 이가 빠지는 수모를 당해도, 곧바로 다시 도전하여 또다시 망가진다. 마치 권투선수가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자기만의 승부욕과 성취욕을 이루어내기 위해서 수없이 두드려 맞고 뒹굴고 다시 도전하는 것과 같이 그 사건들 사이사이, 그 도전과 망신살 사이사이에는 돈끼호테 자신만의 고독과 꿈과 이상이 숨어있고, 독자는 그 고집스러운 광인의 행동 속에서 그 속에 정말로 숨어있을지도 모를 한 가닥의 순수한 희망의 가능성을 찾고 싶어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때 강가의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 옆구리에 맞더니 갈비뼈 두 개가 무너져 내렸다. 이렇게 크게 혼이 나자 그는 틀림없이 자기가 죽거나 큰 부상을 입을 줄로 알았다. 그는 자신의 비약을 기억하고는 그 병을 꺼내어 입에 가져다 대고 배 속에 약을 부어 넣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충분하다고 생각할 만큼 약물을 다 들이키기도 전에 다른 돌멩이 하나가 또 날아와 손과 병에 정통으로 맞아 약병은 산산조각이 나고, 어금니와 앞이빨 두서너 개가 나가고, 손가락 두 개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이 책은 어른들도 쉽게 감당하기 힘들다. 1 권당 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 전체 2권으로 되어있으며, 16세기 당시 유럽과 이베리아 반도 지역의 문화와 화폐, 각종 인물들의 스페인어식 이름과 지명, 사건, 역사들이 수도 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에서 손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돈끼호테와 싼초의 재미난 대화들과 사건들은, 문학에서 말하는 그 '이야기'라는 것이 무엇인지, 세르반테스가 만들고 싶어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 준다.


  세르반테스는 실제로 당시 스페인과 터키지역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여하고, 포로생활을 하고 상해를 입고 투옥되는 과정들을 반복하면서 여러 인종 간의 문제들과 침략의 역사와 시간에 대해서 많은 거시적인 안목과 경험을 쌓았을 것이다. 그가 쓴 것은 소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커다란 인간애이고, 자신의 인생 자체였다고 본다. 다만 그 시각이 웃음과 해학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드러난 것이며, 작가는 한 노인의 일탈에서부터 시작해서 여러 인생의 항로를 돌아 갖가지 사건을 통한 희로애락을 거친 후 집으로 돌아오고 제정신을 찾은 뒤 편안하게 최후를 맞기까지를 그려내어 독자들에게 인생의 의미를 넌지시 제시해준 것이라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이후로, 이렇게 사랑스러운 캐릭터를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리저리 근처에 굴러다녔던 이 작품은 더 이상 그저 그러한 책이 아니었다. 어떠한 작가의 유명한 작품을 제대로 접하는 것은 이렇게 어려운 일이다. TV와 미디어에서 흔하게 축약되어 다루어지는 명작들을 우리는 책상에 앉아서 고요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의 온몸과 마음을 던져 나를 웃고 울게 해 준 돈끼호떼와 싼초에게 지극한 호의를 표하며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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